나는 왜 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뛰는 것을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운동경기를 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해 왔다. 농구나 축구처럼 넓은 공간을 뛸 수 있는 운동은 여전히 즐겁다. 물론 말 그대로 뛰어다니는 행동만 열심히 하는 편이기에 잘하지 못하며, 실력에 따라 대표선수를 익숙하게 뽑기 마련인 곳에선 보통 선수로 뛰지 못했다. 점심시간 친선 경기라도 진다면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이고 생활공간의 분위기 전체가 우울해지던 때, 나는 필요한 선수가 아니었다. 목표가 맞는 사람들과 재미 위주의 운동은 꾸준히 했지만 내심 경기에 뛰고 싶었던 철 지나고 구차한 마음이 남았나 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연락을 돌려 사람을 모아야지만 진행될 수 있는 경기가 생겨날 땐 마다하지 않고 뛰었다. 곱씹어 보면 골을 넣거나 팀이 이기는 것보단 ‘열심히 뛰었는가?’ 혼자 묻고 답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경기장 안에서 역할을 ‘열심히 뛰는 사람’ 정도로 규정하는 순간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부족한 실력을 메우는 방법이라 생각한 것도 같고.
그래서 거리를 정해두고 시간을 측정하는 달리기에는 흥미가 없었다. 공도 없이 무슨 재미로 뛰나 생각했다. 이런 마음은 뜀걸음 기록에 등급을 나누곤 하는 곳을 거치며 바뀌었다. 뛰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넘치는 시절을 보내며 인생 최고 몸무게를 넘어선 상태로, 뛰어야만 하는 공간에 소속되는 것은 곤혹이었다. 함께 측정하는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유일하게 통과기준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던 달리기에 집중(?)했다. 그곳에는 4단계로 나뉜 각각의 등급 시간에 맞추어 뛰는 일종의 페이스메이커가 있었는데, 가장 낮은 등급에 맞게 뛰는 사람 뒤에 바짝 붙어섰다. 반드시 통과하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겨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고 간신히 기준시간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처음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어떻게 그리 쉬지 않고 뛸 수 있어요?” 물론 ‘체형이나 옆에서 지켜본 기초체력에 비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겠지만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시간이 날 때면 뛰기 위해 사람을 모아 운동장이나 영외로 나갔고, 습관으로 굳어져 공간을 벗어나기 전날까지도 꾸준히 뛰었다. 매번 즐겁고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정말 사소한 이유로 좋아진 것 같지만, 돌아보면 큰 의미나 목적이 없어도 꾸준히 하게 되는 것이 쉽게 생기는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적 요인을 빼고도 뛰는 시간은 즐겁다. 뛰려는 목표를 정해두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에 몰입하는 순간도 좋고, 여러 생각이 한곳으로 모여 정리되고 기록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난 방학을 많은 무기력으로 보낸 이후 꾸준히 5km를 뛰려 마음먹었고, 일주일이 조금 넘게 이어가고 있다. 올해부터 다시 간헐적으로 뛰긴 했지만, 꾸준하게 뛴 기억은 조금 희미해질 즈음이었다. 자주 뛰니까 더 오래 생각하게 됐고 글로 쓰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뛰는 동안 숨이 턱 막혀 힘이 들면 오히려 살아있음과 활력을 생생하게 느끼고 정말 행복해지곤 해서 걷는 시간 없이 최대한 뛰려고 한다. (어딘가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 아직은 어렵긴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뛰면서 취향에 어긋나지 않고, 매번 작은 목표를 성취했다는 보람을 느끼기 적당하고, 다음날 뛰는 것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거리로 5km를 정했다. 최근에는 시간도 30분 안으로 줄여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씩 목표를 올리다 보니 더 잘 뛰고 싶어진다. 어제는 ‘코로나 종식기념 하프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이번 가을쯤 실현되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언젠간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몸을 만들고 싶어졌고, 관심이 하나도 없던 근력 운동을 그렇게 시작했다. 마라톤을 하고 싶은 이유는 그래왔던 것처럼 거창하지 않다. 달릴 때면 보통 기분이 좋고, 좋아지니까. 물론 힘이 들어 그만 뛰고 싶다 느낄 때도 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목표는 잊어두고 금방 멈추어 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뛰는 것은 무언가 덕질하는 것처럼 이유를 오래 생각하지 않고도 시간을 들여 즐거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뛸 때도 평소와 같이 복잡하고 해결되지 않는 생각이 들지만 새벽이면 형체도 없이 파고들어 우울하게 갉아먹는 것들과는 질감이 조금 다르다. 뛰는 것에 집중하면 생각은 쉽게 스쳐 지나간다. 코로나로 기숙사를 외출하는 것에 제한이 생긴 이후 밖을 뛰는 것이 어려워져 기숙사 러닝머신을 뛴다. 그리고 생각은 더 빠르게 흘러간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더욱 집중해서 뛰어야 하고 자연스럽게 복잡한 생각은 흘려보낸다. (멀티테스킹을 못하기 때문임이 더 큰 것 같지만) 그런데 지금처럼 뛸 때의 생각을 주워 기록하면 대강의 형태도 보이고 강도도 느껴질 정도로 꽤 구체적이다. 이는 아마 나에게 집중하기 때문인 듯 하다. 매번 이어폰을 끼고 뛰며 끝이 나도 노래는 흘러나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가장 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고, 관계에서 비롯되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후회, 해결하지 못한 외로움을 채워주길 기대하는 불안정한 소속감 등 쉽게 매달리는 감정에서 해방된다. 눈을 감고 안정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조금 걸으며 뛰는 동안 흘러간 생각을 다시 곱씹고 모아든다. 샤워를 하고 취향에 맞는 향이 나는 로션과 핸드크림, 립밤을 바르는 순간까지 머릿속은 오로지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채워진다. 누구도 뛰는 과정을 대신해 줄 수는 없고,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순간이라 그렇지 않을까. 그날의 목표치를 뛰었으니 무엇을 계획하건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도 생긴다. 외부에서 전해지는 감상은 나를 거쳐 해석되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도 있다. 왜 뛰고 있을까? 묻다가 과거부터 요즘까지 달리면서 했던 생각을 하나씩 꺼내 보기도 한다. 막상 찾아보면 특별한 건 없지만 보는 순간에는 피식, 기분 좋아지는 모아둔 편지나 사진처럼.
쓰고 보니 ‘뜀박질은 나의 것 오늘도 달린다’ 협회 홍보대사쯤 된 것만 같다. 이러이러한 장점이 있으니 함께 뛰자고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다. 뛰는 것 자체를 좋아하며, 불안이나 힘 빠지는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쓰고 싶었다. 내장 지방도 빠지고 건강이 좋아지거나,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게 되거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다가 잘 듣지 않았던 신나는 노래(러블리즈의 ‘종소리’는 진짜 띵곡입니다)를 다시 듣게 된다거나 등등. 여러 동기부여를 넘어서는 진짜 이유를 생각한 시간을 기록한다.
나는 앞으로도 뛰는 것을 사랑할 듯하고 여건이 된다면 꾸준히 5km를 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