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하지현의 책 제목,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가 반갑게 다가왔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면 빈틈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이런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저자는 부모가 내어주는 빈틈이 커질수록 아이는 잘 될 것이기 때문에 너무 잘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고 한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불안이 문제이며, 부모가 억지로라도 빈틈을 가질수록 아이의 학업성취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성공할 확률도 커진다고 했다.
부모가 성실하거나 자수성가한 타입일수록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아이가 잘 될 거라고 믿고, 아이도 자신처럼 열심히 해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부모가 아이의 성공을 위해 '뭘 더 해줘야 할까'를 고민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이를 키우며 내 딴엔 챙긴다고 챙겨도 자꾸 구멍이 생기니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미안해하고 자책하곤 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입학해서 한 달 후 처음으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우리 아이만 매주 수요일에 체육복을 안 입고 왔다는 말씀을 들었다. 위아래 노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 혼자 다른 색깔 사복을 입고 있는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안내문이 있었을 텐데 내가 놓쳤다. 무려 한 달간이나. 그때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스스로 자책했으면 이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빈틈'과 내 '빈틈' 사이에는 격차가 있어 보인다. 전자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부모가 일부러 내어주는 여유 공간인데, 후자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어도 수시로 생기는 부모의 준비 부족, 미흡과 오류이다. 그런데 다행히 아이가 철이 들수록 이 간극을 줄여나갔다. 엄마 믿었다가는 자기가 곤란해지겠다는 위기의식 때문인지 점차 교과서나 준비물도 스스로 잘 챙겨갔다. 갑자기 비가 와도 엄마가 우산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아침에 날씨를 살펴 우산을 챙겼다(물론 그 후 자꾸 어딘가에 우산을 놓고 오는 습성은 별개 문제다).
나는 최소한 아이에게
"엄마가 널 위해 어떻게 했는데 너는 이 정도밖에 못하니?",
"넌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니?"
라는 질문을 할 수 없다. 내가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 게 아니라서 아이에게 어떤 기대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가 실수로 제 가방 대신 친구 가방을 집에 들고 와도 내 아들 맞구나 싶고, 당황하고 있을 그 친구 엄마 안심시켜 줄 궁리를 했다. 이런 나의 태도가 어쩌면 아이를 더 편안하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의 부족함이 아이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에게 위안을 주고 아이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수학이 어렵다고 투덜대다가 멍한 내 눈빛을 보고 멈출 때가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수학 과목에서 '양'(요즘으로 치면 'D'등급)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엄마가 수학을 못했고, 지금 자기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면서 감탄한다는 것을 아이가 알기 때문이다.
"네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 정도도 엄마 눈엔 대단해 보여!"
수학 못했던 내가 하는 이 말이, 수학 잘했던 어떤 엄마가
"어떻게 그것도 모르니?"
라고 핀잔을 주는 것보다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주지 않을까?
지리에 능숙한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탄 아이는 의자를 뒤로 젖혀 잠을 자겠지만, 지리를 몰라 헤매는 엄마의 차를 탄 아이는 지도 앱을 켜서 길 안내를 돕는다. 나도 아이와 둘이 여행을 갔을 때 내가 워낙 지도를 볼 줄 모르다 보니 아이가 대신 지도를 살피고 길 안내를 했다. 아이가 앞장서고 엄마가 그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실수로 잘못 안내해도 괜찮다. 어차피 나는 더 모르니까... 낯선 길을 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것은 아이의 공로가 됐다. 낯선 길을 가면서 아이도 조금은 불안하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뒤에 자신을 응원해 주는 보호자가 있으니 용기를 낼 수 있고, 자기 주도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경험들이 아이를 더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것 같다.
핼 에드워드 렁켈('스크럼프리' 교육법 창시자. 자녀교육 전문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부모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
자신이 만든 커다란 빈틈을 빨리 채우지 못해서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이 빈틈이 오히려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음을 기억하자. 뭘 더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엄마가 너무 많은 것을 해 주는 엄마보다 아이를 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키울 수 있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