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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파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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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an 29. 2021

이거 약속이 다르잖아요

지난 파리일기 


파리의 겨울은 좀 별로다.

파리의 여름은 아주 덥고 아주 예쁘고 아주 반짝인다면 겨울은 별로 춥지도 별로 밝지도 별로 뭣도 아닌 그 상태로 5개월을 머문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우면 눈이라도 오련만 5도 안팎을 넘나드는 기온에 우산을 쓰기도 애매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스카프를 하고 나가면 꼭 한 번은 벗게 되는 그런 날씨가 이어진다.


이 별로인 계절에 내게 위로가 되어준 게 있다면 바로 테라스다. 밖이 추우면 안에서 술을 마시면 되지만 굳이 머리 위에 전기난로를 여럿 달아서 작열하는 가짜 햇살로 여름 느낌을 낸 뒤 와인을 홀짝대면 8유로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이것이야말로 제 1세계의 낭만이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근데 이것도 코로나 때문에 다 망했다. 일일 확진자가 K-방역국 출신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치로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코웃음을 치던 프랑스인들이 테라스 그 자리를 사수할 때만 해도 나는 그들을 내심 응원했었다. (테라스에서 와인 마시면 맛있거든..) 그런데 바들이 문을 닫고 이어서 레스토랑이 닫고 8시 통금에 이어 의학적으로 효과가 증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따르라니까 따르는 6시 통금이 적용되고 나선 내 겨울이 조금 침침해졌다.


8시와 6시는 다르다. 6시는 생존의 문제다. 가령 8시에 통금이 시작된다고 하면 마음에 약간의 여유는 있다. 6시 반 정도에 로그아웃을 하고 농땡이를 피우다가 설렁설렁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맞는 시간이다. 그런데 6시는 사람을 5시부터 포기하게 만든다는거다. 아주 잔인해. 예를 들어 내가 오늘 파스타를 먹고 싶은거야! 페스토가 좋겠어! 그런데 없는거지 그래서 사러 나가려고 하는데 시간이 이미 5시 5분이야! 전에 이 시간에 나가보니까 다들 장보러 나왔던데, 지금 나가면 6시에 들어오겠구만 근데 그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안 나가게 된다. 냉장고에 있는 걸로 대충 챙겨먹고 나면 약간 우울해진다. 그러니까 6시는 가끔 저녁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생존의 문제다.


가끔 귀여운 일도 있었는데.. 6시 통금 규정이 발표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회사 팀 미팅이 있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는 6시 통금과 일상을 어떻게 병행할 것인가였다. 사람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과 말투로 매니저급에게 - 6시 통금으로 인하여 우리의 저녁 시간이 사라졌으니 5시 경에 장을 보는 등 필수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유연근무를 보장하십시오- 라고 제안하고, 채팅창에선 동조하는 사람들이 옳소, 옳소 외치는 걸 보고 약간 웃음이 났다. 5시에 장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놓고 토론하는 세상이 된 것도 기상천외한 일인데, 배운 사람들이 정제된 언어로 우리 모두 5시부터 장을 봅시다 라고 제안하는 것도 웃겼다. 재밌는 세상이야..



근데 그렇게 재밌진 않으니까 두 달 정도만 더 하고 끝났으면 좋겠다. 작년 연말엔 2021년이면 코로나가 마법처럼 사라질 것 같더니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

이젠 정말 바캉스만 보고 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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