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읽기는 첫 페이지에서 시작된다

중국어원서의 첫 페이지 씹어먹기

by 윤셰프





책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을 여는 첫걸음이 시작된다




중국어 원서를 읽고자 할 때, 나에게 잘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중국어 원서’라고 하면 흔히 딱딱하고 지루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의외로 말랑말랑한 감성을 품은 책들도 많다. 가벼운 에세이부터 따뜻한 이야기까지, 나의 취향과 딱 맞는 책을 만날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별 기대 없이 펼친 한 권의 책에서 뜻밖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따뜻한 문장 하나에 마음이 환해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깔깔 웃으며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도 있다. 마치 오랜만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게 되는 것처럼, 책과 나 사이에 그런 기분 좋은 연결이 생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책은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당장 덮어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결국 ‘어떤 책을 읽을지’는 원서 읽기의 첫 단추이자, 이 여정을 이어갈 수 있을지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나에게 잘 맞는 책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완벽한 정답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적용해 볼 수 있는 작지만 강력한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첫 문장, 첫 단락, 첫 페이지 혹은 첫 챕터를 집중해서 읽어보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 첫인상을 통해 느낌을 받듯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도입부에 이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감정과 사유를 담고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흘려보낸다.


최승필 작가는 《공부머리 독서법》에서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핵심을 첫 문단이나 단락에 압축해 숨겨두거나, 중요한 화두를 심어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첫 장만 잘 읽어도 글의 분위기, 난이도, 인물의 성격이나 주요 사건의 윤곽이 잡히며, 독자는 그 안에서 ‘재미’의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중국어 원서를 고를 때마다 책의 시작을 굉장히 신중하게 읽는다. 읽을까 말까 망설여질 때, 혹은 흥미는 있지만 문턱이 높게 느껴질 때 저는 늘 책의 첫 다섯 단락을 정독한다. 이때만큼은 필사도 전체 필사를 한다. 단락을 생략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써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이 지금 나에게 맞는지, 어떤 매력이 있는지 조금은 분명해진다.


첫 페이지를 읽을 때 나는 늘 연필을 든다. 인물, 사건, 배경에 밑줄을 치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는다. 이렇게 집중하다 보면 생각보다 읽을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이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한 과정이 쌓여, 원래라면 겁을 먹고 포기할 수도 있었던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방법은 특히 문학작품에서 더 빛을 발한다. 작가가 왜 특정 인물, 이름, 배경,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작품의 흐름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문장 곳곳에 숨겨둔 상징과 의미도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첫 문장에서부터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 한 줄에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가 이미 담겨 있다. 독자는 이 흐릿한 날씨 속에 깃든 주인공 김첨지의 비극적인 결말을 어렴풋이 예감하게 된다.



중국 작가 위화(余华)의 《제7일(第七天)》은 첫 문장부터 독자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浓雾弥漫之时,我走出了出租屋,在空虚混沌的城市里孑孓而行。我要去的地方名叫殡仪馆,这是它现在的名字,它过去的名字叫火葬场。我得到一个通知,让我早晨九点之前赶到殡仪馆,我的火化时间预约在九点半。

nóngwù mímàn zhī shí, wǒ zǒu chū le chūzūwū, zài kōngxū hùndùn de chéngshì lǐ jié jué ér xíng. Wǒ yào qù de dìfāng míng jiào bìnyíguǎn, zhè shì tā xiànzài de míngzì, tā guòqù de míngzì jiào huǒ zàng chǎng. Wǒ dé dào yí gè tōngzhī, ràng wǒ zǎochén jiǔ diǎn zhī qián gǎn dào bìnyíguǎn, wǒ de huǒ huà shíjiān yùyuē zài jiǔ diǎn bàn.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을 때, 나는 셋집을 나와 공허하고도 모호한 도시를 휘적휘적 걸어갔다. 목적지는 빈의관. 예전 명칭은 화장터였다. 나는 아홉 시 전까지 도착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의 화장 예약 시간이 오전 아홉 시 반이라고 했다.”




화자가 자신의 화장 시간을 통보받았다고 말하는 설정은 독자를 당황하게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죽은 사람의 시점일까? 현실인가, 환상인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 도입부는 이야기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이 사람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특히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浓雾弥漫)"는 날씨 묘사에서는 숨 막히듯 답답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어지는 "공허하고 혼돈스러운 도시(空虚混沌的城市)"라는 표현은, 그 답답함이 단지 날씨 때문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에워싼 감정임을 암시한다. 작품은 시작부터 한 겹의 어둠을 담담히 덧입히며 독자를 그 안으로 천천히 이끈다.



이 분위기는 주인공의 동작을 묘사한 ‘孑孓而行’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깊어진다. 이 단어는 ‘홀로 천천히 걷는 모습으로, 외롭고 쓸쓸하며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一个人独自慢慢走,形容孤独,寂寞,心情失落的样子黯然而去)’를 뜻한다. 단순한 동작 하나에 이토록 복잡한 심리가 담겨 있다.


그는 단순히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도시의 혼돈, 안개의 침잠, 고독한 걸음. 이 모든 요소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독자를 서서히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첫 문장만으로도 이야기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예고하고, 동시에 한 사람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다른 예로,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태항산(太行山)을 배경으로 한 거쉐이핑(葛水平)의 장편소설 《산이 울다(喊山)》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太行山峡谷走到这里开始瘦了,瘦得只剩下一道细细的梁。


“태항산 협곡은 여기쯤 오자 좁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말라서 가느다란 들보 하나만 남은 듯했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지형의 묘사를 넘어선다. 협곡이 점점 좁아지는 모습을 ‘瘦(마르다)’라는 표현으로 드러낸 점이 인상 깊다. ‘좁다(窄)’, ‘비좁다(狭小)’ 같은 중립적인 단어 대신, 의도적으로 '마르다'는 감정적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공간 자체에 황량하고 척박한 현실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고대 중국어에서 ‘瘦’는 단순한 외형의 마름을 넘어 쇠약하고 병든 상태를 암시하기도 했기에, 이 문장은 소설의 정조를 어둡고 고요하게 가라앉힌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고함을 쳐야만 겨우 목소리가 닿는 거리에서 살아가고, 인물 ‘한충(韩冲)’이 황미워터우(黄米窝头)를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등장한다. ‘窝头’는 옥수숫가루를 쪄서 만든, 퍽퍽하고 메마른 음식으로, 중국 농촌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그 마을의 생활 수준, 인물의 삶의 결을 생생히 그려낸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고단함’이 묵묵히 밑줄 그어진 문장들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 작가는 단어 하나, 묘사 하나를 결코 허투루 쓰지 않는다. 풍경을 설명하는 듯 보이는 문장 안에 마을 사람들의 삶, 그들의 고요한 절망, 침묵 속의 목소리가 응축되어 있다.


이처럼 《산이 울다》의 도입부는 한적한 산골의 풍경 속에 숨어 있는 삶의 건조함과 존재의 무게를 예고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 삶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 보게 만든다.






이처럼 첫 페이지에 집중해서 읽어도 충분히 원서 읽기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 단 한 장의 문장들 속에서도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고, 분위기의 결이 느껴지며, 이야기의 주제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과 나 사이의 온도를 맞추는 시간이 생기면, 읽기의 불안은 점차 설렘으로 바뀐다.



결국 ‘읽을 만한 책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추천도, 서평도, 별점도 나의 감각만큼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첫 페이지를 진심을 다해 정독해 보는 그 짧은 시간은, 내가 이 책과 함께할 수 있을지 충분히 가늠하게 해 준다. 그 한 장은 마치 문 앞에서 살짝 열린 창처럼, 책 안의 세계를 미리 엿보게 해 주고, 어쩌면 읽기의 여정을 시작하게 만드는 강력한 끌림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원서 읽기가 망설여진다면, 책을 고르기 전, 제목이나 두께에 주눅 들기 전에, 그냥 조용히 첫 페이지만 읽어보자. 어렵고 낯선 언어가 아니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거는 문장 하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한 줄, 그 한 단락이 오늘의 당신에게 꼭 필요한 위로나 영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권의 책과 마음이 닿는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언어의 외국인이 아니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야기의 일원으로서, 조용히 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그 한 페이지가, 중국어원서와 당신을 이어주는 가장 따뜻한 다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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