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자존심 내려놓기

by 윤셰프








내가 중국어 원서를 읽으려고 마음먹고 중국 문학책을 펼쳐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좌절감’이었다. 중국어를 아무리 안 쓴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동안 중국어를 배워온 시간이 얼마이며, 중국에서 유학까지 했는데, ‘내가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아직도 이렇게 많았다고?’라는 생각이 들며 애써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 표현은 또 뭐지?’ ‘이 문장 구조는 왜 이렇게 낯설지?’ 책장을 넘길수록 익숙한 단어보다 낯선 표현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익숙하다고 믿어왔던 언어가 낯선 얼굴로 나타난 듯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도대체 뭘 공부한 거야?' 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계속 피어올랐다. 그렇게 원서를 펼친 채,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적이고도 불편한 경험이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중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고, 학문적으로도, 또 중국에서 생활하면서도 꽤 오랜 시간 중국어를 접해왔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실력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원서를 읽으며 마주한 현실은 냉정했고, 부끄러웠고, 무력했다.





실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용기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쌓아온 허울 좋은 자존심 대신, 비워진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진 건 ‘완성된 실력’이 아니라 ‘공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원서를 펼쳤다. 느리게, 천천히, 반복해서.


읽고, 베끼고, 다시 읽었다. 때로는 한 문장을 곱씹는 데 하루를 썼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읽기’는 내게 공부이자 명상이 되었고, 내 안의 허영심을 내려놓는 일종의 훈련이 되었다.


출처 | 픽사베이




《어른을 위한 인생수업》이라는 책에 태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사건이 소개된다. 1955년, 방콕의 한 사원에서 거대한 불상이 있었는데, 도시 보수로 사원을 옮기면서 이 불상도 함께 옮겨야 했다. 일꾼들이 불상을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하자 주지승은 급하게 작업을 중단시켰다.



같은 날 밤, 이 불상을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주지승은 불상 표면의 갈라진 틈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석회 반죽 사이에서 특수 열쇠를 찾아냈고, 이를 이용해 불상을 9등분 한 뒤 석회 반죽을 모두 떼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태국의 3대 국보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황금 불상을 찾아내게 된다. 이 불상은 과거 전쟁과 약탈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석회 반죽으로 덮어 위장했던 것이었고,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깊이 흔든 이유는 단순히 ‘황금 불상’의 발견이 놀라웠기 때문이 아니다. 겉으로는 단단하고 거대해 보이던 불상의 표면에 생긴 갈라진 틈, 바로 그 ‘약점’이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금이 가지 않았다면,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황금은 아마 영원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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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는 오랜 시간 중국어로 수업을 듣고 리포트를 쓰고 시험을 치렀다. 전공서적이나 참고문헌은 늘 중국어였고, 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사용했다. 그런 환경 속에 있으니, ‘굳이 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함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문학작품 한 권을 끝까지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다. 학업이나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원서를 마주했을 때, 그동안 외면해왔던 ‘진짜 약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복잡한 문장 앞에서 자꾸 머뭇거리고, 낯선 표현을 마주할 때마다 괜히 다른 페이지로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공부의 긴장감을 놓아버린 사이, 내 실력은 어느새 멈춰 있었고, 조금씩 퇴보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이다.




나는 진짜 실력보다 그저 ‘중국어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신경 썼던 거다. 한 층 한 층 보호색을 덧바르듯 말이다. 내가 잘 이해되는 중국어 콘텐츠만 보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불필요한 설명으로 포장해 가며 대화를 이어가고, 막히는 대화 앞에서는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그런 방식은 중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 겉보기로는 유창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 안에 텅 빈 자신감을 쌓아 올리고 있었던 셈이다.



진짜 실력은 그런 식으로 갖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원서를 읽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단단하고 반짝이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집중하는 대신, 불편하고 낯선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문장을 피하지 않고, 낯선 표현을 그대로 끌어안고, 스스로 이해하려 애쓰는 그 시간이야말로 진짜 공부였다. 그런 점에서 내게 중국어 원서는, 황금 불상의 석회 반죽을 뜯어내게 한 ‘특수 열쇠’와 같았다. 원서를 읽으며 느낀 모자람과 좌절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갈라진 틈, 그 불편한 약점 속에서 내가 진짜 실력을 마주하고, 다시 쌓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는 대신, 내가 잘 모르는 지점을 인정하고, 그 약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차근차근 파고들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조금씩 단단하고 반짝이는 진짜 실력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진짜 공부는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것, 그 불편하고 낯선 틈을 용기 있게 파고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약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문제의 인식이 곧 변화의 시작이며,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기회다.
벌어진 틈을 용감하게 파내다 보면
나의 상처 안에 숨겨진 커다란 힘을 발견할 것이다.

- 『어른을 위한 인생수업』




잘 안 되는 걸 포기하지 않고 붙잡는 것. 모르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 천천히, 제대로, 나의 속도로 읽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잘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확신은 말로 증명되지 않았다.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책 앞에서 꿋꿋이 앉아 있는 나, 하루 10분이라도 원서를 펼치는 나, 문장을 음미하고 생각을 적는 나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갖췄느냐고 묻는다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자세 하나로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실력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힘에서 시작된다. 남에게 보여줄 실력이 아니라,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공부. 원서를 읽는다는 건 그런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작은 약속이었다.



반짝이는 결과가 아니라, 그 안에서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나기 위한 길. 그래서 나는 오늘도 원서를 읽는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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