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
비 내리는 날이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비 갠 후의 산책이었다.
고베로 떠나던 날 아침,
잠시 아리시야마에 들렀다.
애써 할 일을 정하지 않았던 건
두서너 번은 더 다녀갈 생각이었기에.
그렇지만
(교토에 머무는 동안
아라시야마를 매일처럼 지나쳤지만)
제대로 땅에 발을 디딘 건
결국 이날의 반나절이 전부였다.
이날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등성이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느린 걸음으로 타박타박,
비 내음을 흠뻑 머금은 공기가 코끝에 스미면
나도 모르게 모든 신경이 코끝으로 쏠렸고,
발끝이 촉촉한 땅에 닿을 때면
흙 내음이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고인 빗물 위에는 꽃망울이,
땅 위로 내려앉은 전깃줄이,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비와 어우러진
평온한 풍경이 펼쳐졌다.
인적 드문 한적한 길을 잘 찾는 건
어쩜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재능일지도.
그 길가에서 활짝 핀 사쿠라 대신
빗방울에 부푼 꽃망울을 발견했고,
봄날의 수많은 기대 속
그 어디에도 없었던
싱그러운 솔방울도 만났다.
그것만 보여주고 보내긴 미안했는지
(만약 봄의 신이 있다면)
아주 작긴 했지만
빗방울이 송송 맺힌 사쿠라도 안겨주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사쿠라를 마주한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나는 꽃잎에 최대한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갔다.
초점을 빗방울에 둘까 꽃잎에 둘까를
수없이 망설이며.
그렇게 타박타박 걷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산 끝 안개 너머로 연분홍빛 몽글몽글
흐릿한 동그라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분홍빛 절정의 순간을
물론 넘어설 순 없겠지만,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몽글거리는 색채의 향연도 그 못지않게 멋졌다.
다시 또 타박타박,
바라보는 방향을 바꿨더니
도케츠교도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다시 발걸음을 몇 발작 옮기니
안개의 흐름에 따라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번엔 용기를 내어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위로 뻗은 돌계단을 따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인기척 없는 길.
좁아졌다 조금 넓어졌다를 반복하는
이끼로 둘러싸인 급경사의 돌계단에
묘한 스릴을 느끼며
그렇게 위로 또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 돌계단 끝에서 마주한 풍경,
토롯코 열차 철로 옆으로 호즈강이 이어졌고
그 철로를 사이에 두고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웅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마도 나는 저 길 어디쯤을
매일 전차를 타고 지나다녔던 것 같다)
돌계단 오르막길과 반대 방향의 완만한 내리막길은
치쿠린노미치[竹林の道:대나무 숲]로 이어졌다.
구글맵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만 걸어도
결국엔 필연처럼 만나는 게 되는 치쿠린노미치.
대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토롯코 열차,
좀 전에 본 장난감 같은 철로를 따라 달려왔을
토롯코 열차가 지금은 관광객을 태우고 있다.
어느새 아라시야마의 곳곳엔
힘찬 발걸음의 인력거 행렬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그때가 바로
내가 아라시야마를 떠나야 할 때.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사가아라시야마역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