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 여행
처음 발을 디뎌보는 우오자키도
느낌이 좋았다.
새롭게 정리된 듯하지만
오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동네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곳에 롯코 라이너가 생겨
아쉽게도 이쇼안을 이축해야만 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롯코 라이너가 생겨 편리한 점도 있지만
오랜 시절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사람들에게 있었을
거부 반응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쇼안은 사사메유끼 [細雪 세설]의 무대였던
아시야의 집의 실제 모델이며,
타니자키와 마츠코 부인
그리고 마츠코 부인의 자매들이
실제로 거주했던 곳이다.
문패에 새겨진 타니자키의 이름을 보니
이 문으로 들어서면
소설의 세계로 곧바로 이어질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곳 또한 주말에만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이 집은 타니자키의 자가는 아니었고
빌려 살던 집인데 계약이 만료되고도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집을 비우지 않아
집주인과 작은 트러블도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남겨져 있다.
실내는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응접실과 2층 방 등 집안 곳곳이
잘 보존되어 있어
지금 이대로 이곳에서 생활을 해도
아무 불편이 없어 보였다.
소설 속의 집은 실제의 집보다
1.5배 정도 더 크게 묘사되어 있어
실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조금 아담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생전 인터뷰에서 마츠고 부인은
소설은 실제 마츠코 자매의 일상이
일기처럼 너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그것이 소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2층 방 창가에서 주인공 유키가
창밖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창이 바로 저 창이다.
2층으로 직접 올라가 창밖을 내려다보니
의외로 높이가 느껴져
정원 풍경도 훨씬 더 멋스럽게 보였다.
이축 전에는 저 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을 것이라고 했다.
매립지가 되어버린
해안선을 그리워하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닌 것 같다.
타니자키는 관동대지진 이후
간사이로 이주하는데
작품 세계도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특히 간사이 이주 후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의 사투리가 아주 인상적이다.
사사메유키에도 간사이 사투리가
아주 우아하고 귀품 있게 그려지는데,
[こいさん、頼むわ。]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첫 문장은 한국에서는 어떻게
변역되었는지 문뜩 궁금해진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건너편에서 다시 이쇼안을 보니
또 새로웠다.
잘 정돈된 사사메유키의 세계가
시간의 흐름에도 주위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우뚝 서 있는 모습에
이곳을 아끼고 가꾸는
많은 사람들의 애정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유난히 커다란 소나무가 많은 동네,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는 사람의 모습과
뜸하게 지나가는 롯코 라이너의 소음이
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이 오래 남는다.
다시 산노미야로 돌아와서,
고베 여행의 마지막 밤은
피자가 맛있다는 피노키오에 들렀다.
치즈를 듬뿍 올린 타르트 같은 피자,
피자를 주문하면
내가 먹는 지금의 피자가
이 가게가 오픈한 후
몇 번째로 만들어진 피자인지
넘버가 찍혀 나온다.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커플이 양옆으로 앉았다.
합석 자리다.
한 쪽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커플
한 쪽은 익숙할 만큼 익숙하고 친숙한 커플.
그 두 커플이 어떤 사이라도
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앉은 나의 어색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만 갔고
결국 나는 그 집의 1449299번째 피자를
반쯤 남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맥주 기분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고베의 마지막 밤.
반쯤 남은 논 알코올 맥주와
카키노타네를 먹으며
그렇게
고베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