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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B Oct 26. 2024

담담하게! 당당하게!

단어와 개념과 문장과 이론을 넘어서서 '나'를 찾아본다면.


너의 존재를 설명해 봐!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지각은 하늘에 天, 땅에 地라는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人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언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 맺는 인간은 '명명(命名)'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고 개념을 범주화하고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선(善)과 악(惡),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역시 인간이 명명한 관념에서 비롯합니다. 


수없이 많은 색채로 이루어진 무지개를 일곱 색깔의 그룹으로 구분하고 '빨주노초파남보'라는 명칭을 명명한 것도 언어를 바탕으로 세상을 인지하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천간은 열개의 글자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되어 있지만 이들 글자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지의 열 두 개 글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역시 사람의 언어가 명명(命名)한 개념입니다.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진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명명하고 범주화하여 만들어 낸 논리입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지만 음(陰)과 양(陽)이 고정되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본성을 선이나 악으로 고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나는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선설은 선과 악을 거론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전제는 인간에게 천부인권을 부여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 생물학적 욕구와 도덕적 경향성이 함께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해방감을 느낍니다. 첫째, 생물학적 욕구에 직면하며 지나치게 죄의식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도덕적 경향성이 인간의 본성인 만큼 생물학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 해방감과 더불어 선한 이웃들과 함께 이 사회가 긍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맹자의 사상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관계성 안에 놓여있습니다. 이때 인(仁)은 목(木)으로, 의(義)는 금(金)으로, 예(禮)는 화(火)로, 지(智)는 수(水)로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속성을 목화토금수라는 오행(五行)으로 명명(命名) 한 것도, 행(行)이라는 글자 안에 움직임과 나아감의 의미를 부여한 것도, 관념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도덕 속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바뀌어 나아가고(變),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집니다(化). 바뀌어진 것은 또다시 다른 것으로 바뀌어 나아갑니다. 우주 만물은 모두 변화 안에 놓여 있으며 그 변화는 질서 안에 놓여있습니다. 그러한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 오행(五行)입니다. 선(善)이었던 것이 악(惡)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부여받다'는 표현이 완전하게 적합하지 않기는 하지만, 인간은 천(天)의 질서 안에서 명(命)을 부여받아 태어납니다. 자기만의 십자가, 소명 혹은 업보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명(命)은 운(運)하는 시간 즉 천리(天理)와 함께 변(變) 하기도 하고 화(化) 하기도 합니다. 단어와 개념과 문장과 이론을 넘어서는 '나'를 마주하는 이해가 명리 공부 안에 있습니다.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하게 하는 공부입니다.



담담하게, 당당하게



한 분야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랜 세월 후학들을 길러오시면서, 명리학에 대한 교육관과 철학을 전해주셨습니다. 정보화 시대 이전의 명리학과 이후의 명리학을 비교하여 설명해 주시는 과정에서 명리학과 함께한 선생님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신념을 형성하여 전념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명리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신념이 되었고, 전념하신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다양합니다. 나와 타인이 다르므로 다양하기도 하지만, 나라는 하나의 개체가 경험하는 삶 역시 다양합니다. 나는 유년 시절 겁도 없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는 주눅 들고 자신 없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20대에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못난 내 모습에 좌절했습니다. 30대에는 과도한 욕심으로 이기적인 마음이 많이 일었습니다. 40대 초반의 나는 시련 속에서 우울감과 불안함을 기본값으로 삶을 대했습니다. 40대 후반의 나는 무모한 마음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좋고 나쁨으로 사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좋은 일 가운데 나쁜 일이 있기도 하고, 나쁜 일 가운데 좋은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신(用神)의 다양성에 대하여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주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근대 명리학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말씀해주신 내용은 우리나라 명리학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생각합니다.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나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변화하는 나의 삶을 담담하게 마주하게 합니다.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들은 담담함 안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명리 공부의 참다운 매력을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또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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