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흐른다
공자, 맹자, 노자, 싯다르타, 예수, 탈레스, 소크라테스 등의 성인과 사상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삶과 진리에 대하여 논한다면 각기 다른 주장을 하며 전투태세가 되어버릴까? 만약 이들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시공간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라는 가정이 있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을까? 물론 개성이 뚜렷한 이들의 만남이니 자기만의 존재감으로 논리를 펼쳐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이야기의 끝은 진리(眞理) 혹은 도(道), 자연(自然)이라는 단어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시공간을 막론하고 다음의 두 가지는 인간의 삶을 논할 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공통의 전제입니다. 첫째, 인간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드러나는 변화(變化)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사상, 철학은 이러한 공통의 전제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관점은 언제나 타인과 공동체를 위함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인들이 쏟아놓은 주옥같은 이야기를 후대의 사람들은 탐구합니다. 이때 각자의 시공간이 요구하는 필요에 이끌려 특정 성인의 사상을 수용하거나, 또 다른 사상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종교나 사상은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들에 한정합니다.) 한 인간은 모든 성인의 지혜를 수용할 수 없고, 각기 다른 사상들이 제시하는 모든 수행 과정을 흉내 낼 수 없으며, 모든 통찰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종교를 맹신하거나, 하나의 사상에 몰두합니다. 하나의 종교나 사상에 몰두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 몰두와 몰입의 끝은 도(道)에 닿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술을 전공하신 진평 선생님은 수업과 관련 있는 그림이나 만화를 칠판에 뚝딱 그려내시고는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렇게 편안하지만 또 때로는 매우 어려운 분이라 늘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평 선생님의 사행도를 공부하면서 명리 지식과 논리를 도식화하고 표준화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음양과 오행의 기본 논리는 다양한 사주 명리 고서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논리가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고서(古書)의 텍스트를 좁게 이해하고, 단편적 지식만을 채택했기 때문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서를 바탕으로 한 이론이므로 흥미 있는 주제로 화려한 설명이 덧붙지는 않습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현대인의 이해를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신고전(新古典) 혹은 New classic이라 지칭하고 싶습니다. 신(新)이나 New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명리에 대한 모든 이론은 하나로 흐릅니다.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든 그 몰두와 몰입의 끝은 도(道)에 닿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물욕이 없었던 때가 있을까요? 이기심과 물욕이 불러일으키는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역시 시공간을 막론하고 항상 공존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 자연관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인간 소외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 이기심과 물욕에 따른 폐해의 심각성이 극에 이르게 된 이 시점에서, 대중은 본래적 자연관과 천인 합일, 인간성 회복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크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신고전(新古典) 혹은 New classic이 힘을 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양의 사상과 지혜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