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양종 선생님
명리학 공부를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스스로의 공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공부가 양적으로 확대되어 방대해지기는 하였지만, 핵심 맥락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허술함을 인지했습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십이운성'과 '십이신살'에 대한 공부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십이운성과 십이신살과 같은 이론을 배척하는가를 고민해 보니,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권하시지 않는다는 이유가 전부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나 역시 십이운성과 십이신살과 같은 이론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한 결정은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깊이 탐구하여 알아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이운성과 십이신살을 정확하게 공부한 이후에 이 이론들을 나 스스로 평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동영상 강의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음간과 양간을 같이 보며 설명하는 선생님, 스스로 새로운 이론을 만드신 선생님 등 십이운성에 대한 설명은 다양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수강하였지만, 예로부터 전해진 것의 틀을 정확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백민역학연구원'이라는 동영상 강의방을 찾아내게 되었고, 십이운성과 십이신살 강의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강의를 수강한 기간을 선생님과 인연의 일방적 소통 시기라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철두철미합니다. 깔끔한 판서와 기승전결이 나누어지는 수업의 흐름에 전직 교사이신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십이운성, 십이신살 강의를 다 듣고 나서, 나는 이 이론들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부를 시작으로 십이운성에 대하여 깊이 궁리하고, 다양한 고서를 바탕으로 공부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 수업 중 <현대 명리학 탐방>이라는 강의가 있습니다. 신정원 교수님께서 명리학계의 명사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강의입니다. <남청화 북창광>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그 강의에 박청화 선생님과 창광 김성태 선생님께서 나오시는 것에 대해서는 놀랍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 분의 명사 중 백민 선생님이 소개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매우 놀랐습니다. '백민역학연구원' 동영상 강의방에서 나에게 수업을 전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현대 명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인터뷰를 허락해 주시는 과정에서 자신감이 생겼는지, 백민 선생님께 바로 인터뷰를 부탁드리는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사주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시고, 풀이를 하시는지가 궁금해져서 인터뷰를 말씀드리기 전에 전화 상담을 예약하였습니다.
전화 상담은 강의가 되었습니다. 격에 대하여 질문을 드리고 답을 듣는 과정에서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용신'에 대한 어떤 큰 이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꼭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평소 매우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청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별땅연구소>, <대산역학연구회>의 선생님들께서도 백민 선생님의 제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유튜브 채널에서의 인터뷰 요청을 드려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응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암으로 투병 중이시라는 말씀 하셨습니다. 건강상의 문제로 당장 만나기는 힘들고 시간을 잘 조정해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암과 싸우고 이겨 내시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내가 선생님을 힘들게 해 드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졌습니다. 나의 죄송스러운 마음이 전해 져서였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선생님도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소통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과 뵙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중간에 선생님 건강이 나빠지셔서 일정이 미뤄지기도 하였습니다.
인터뷰 당일,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하시는 선생님을 뵙고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일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일생토록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힘든 일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도록, 한평생 이 공부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고 후학 양성에 노력을 다하신 모습에 깊은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하나라도 더 전해주시려 말씀하시는 모습에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선생님 약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육대학을 나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국대학에서 철학 박사 하셨고요. 1997년 동국대학 사회교육원에 역학 과목을 개설하시면서 한국 최초로 제도권 교육에서 역학 강의를 시작하셨다고 제가 알고 있습니다. 대단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민역학연구원 이사장이시고, 경기대, 동국대 사회교육원, 대불대, 서울 사회복지대학원 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오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2022년까지 서경대학교에서 강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민 선생님) 교육대학은 졸업을 못 했어요. 2년 다니고 수료는 했는데, 아쉽지만 제적당했어요. 졸업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역학을 공부하고, 강의하고, 상담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강의를 한 세월은 40년이 넘었네요. 제도권 안에서 공부하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 가장 의미 있다고 봐야겠지요. 동국대학에서 강의하기 전에는 개인적인 강의를 주로 하였습니다. 사단법인 한국역술인협회의 관인 '동양 영리 학원'이라는 곳에도 강의했습니다. 예전에는 관인 학원이 있었어요. <사주첩경>을 쓰신 이석영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한일 영리 학원'이라는 것도 있었어요. 남영동, 청파동 그쪽 근처에 있었던 시절입니다. 관인 학원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나마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92년도에 제가 그 학원에서 강의하기도 했어요. 92년도가 공적인 강의로는 처음이었어요.
(제이선생님) 긴 세월 강의하는 삶을 사셨네요. 인터뷰 시작 전에 선생님께서 저에게 주신 자료를 가볍게 보았는데요, '진리라도 신비나 상술과 야합하면 미신이 된다.' 이런 말이 적혀 있더라고요. 명리 공부가 신비, 상술과 야합하면 미신이 됩니다. 이 분야를 '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저변이 이렇게나 늘어나는데, 선생님께서 상당한 공헌을 하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백민 선생님) 과찬이고. 조금 의미를 둔다면, 제가 처음 공부 시작하고 또 강의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음지에 있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제 음지에서 양지로 많이 올라왔지요. 제도권에서도 강의하고, 학위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음지에서 양지로 살짝 끌어내는 역할? 그 정도로 제 역할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제이선생님)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많은 부분 양지로 올라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 공부랑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을까요?
(백민선생님) 그 이야기를 하면 좀 가슴이 짠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지요. 앞서 소개해주신 대로 저는 원래 교육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교육대학으로 진학한 이유는 교육에 대한 어떤 꿈이 있었다는 것과 병역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이었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직장과 병역을 해결할 수 있는 교육대학이 좋았지요. 어렵게 대학 생활을 했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운동을 했지요.
(제이선생님) 운동? 아, 학생 운동하셨지요.
(백민선생님) 네. 그러다 보니, 2년 공부를 다 마치고 제적당했어요. 그 당시 제적당하면 1주일 내로 군대 입영 영장이 나와서 끌려가다시피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지요. 3년 군대 생활을 다 채우고 만기 전역하고 나와서 보니, 복학도 안 되고요. 취직도 안 되더라고요.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고시 공부한답시고 전북 김제 금산사 뒷산 모악산에 있는 작은 암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이 계통의 공부를 접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시작했죠.
(제이선생님) 그렇게 이 공부와 인연을 맺으셨네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동영상 강의를 많이 들었는데요, 들으면서 보니 커리큘럼이나 수업하고 판서하는 방식들이 교육학을 공부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대 수료까지 하셨다지만, 결국에 공부는 다 하신 것이니. 교육대학에서의 배움이 선생님의 교육 방식에 이렇게 다 녹아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백민선생님) 당연하죠. 제이 선생님도 교육계에 종사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교안 다 준비해야 하고, 자료 준비도 해야 하지요. 그다음에 무엇보다도 제가 처음 이 공부하면서 많이 아쉽게 느꼈던 것이 체계적인 공부가 어려웠어요. 체계적인 공부라는 것은 기초 과정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스텝 바이 스텝으로 공부를 하는 것인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백일 완성'이나 '몇 달 안에 비법 전수'와 같은 식으로 공부하다 보니, 기본적인 이론의 기초가 안 되지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체계적인 강의를 하자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음양, 오행, 간지. 그다음에 오행의 변화인 상생상극, 그다음에 간지의 변화인 합과 형, 충. 그다음에 사주를 작성하는 법. 요즘은 만세력 앱이 있어서 그냥 툭툭 치면 도출되지만, 당시에는 만세력을 찾아가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절기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죠. 그래서 절기에 관한 것, 그다음에 육신, 그다음에 육신의 변화, 그다음에 신살, 격국, 조후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나가야 합니다.
사주를 대충 뽑아 놓고, 풀려고 합니다. 통변부터 하려고 하다 보니까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강의 방식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초부터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이 아무래도 제가 예전에 학교 때 배운 것과 연결이 되었겠지요.
(제이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교육대학에서 제적당하신 일이 선생님 개인으로는 힘든 시기셨지만, 명리학이 이렇게 제도권으로 나오고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셨다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선생님의 교육대학에서의 배움이 명리 교육의 철학으로 연결되어서, 많은 후학을 길러내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백민 선생님) 과찬이시고요. 다른 데서 공부를 많이 했어도 뭔가 체계가 엉켜서 꿰지를 못했는데, 하나씩 차근차근 꿰어진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또, 백민 선생님과 공부하신 분들은 또 교육 방향, 교수 쪽 가르치는 쪽에 많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 선생의 제자, 그 코치에 선수 아니겠냐고 농담하고는 합니다.
(제이선생님)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즈음 몸이 좀 안 좋으시죠. 제가 너무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백민 선생님) 제가 암 투병 중입니다. 그래서 컨디션에 따라서 많이 달라져요. 그런데 저는 아프다가도 강의를 시작하면 나아요. 이게 무속인들이 굿할 때 기분 아닌가, 신명 나는 것처럼. 그래서 저는 천상, 타고나기를 선생님이구나, 강의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몸이 안 좋습니다만 며칠 전,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한 번 연습해 봤습니다. 그런데 만만치 않더라고요. 이럴 때 누가, 어느 선생님이 하나 탁 알려주고 찍어주면은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하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명리 공부에서의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제이선생님) 네. 앞서 공부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보면서 뒤의 사람들이 따라가지요.
(백민선생님) 모르는 부분을 정확하게 누군가 이야기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명리 역학을 처음 공부하면서 가장 마음속에서 들려왔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강의하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였어요. 배우는 시기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 부분에는 이런 표현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이 설명을 덧붙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항상 했지요.
(제이선생님) 저도 공부할 때 늘 그런 마음입니다. 이건 이렇게 가르치면 좋을 텐데, 이건 이런 자료를 덧붙이면 좋을 텐데, 이런 식이지요.
(백민선생님) 천상, 선생님들은 그런가 봅니다. 그게 선생님들 스타일이지요. 그래야 더 나은 강의가 되지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강의하면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어요. 내가 강의한 대로, 가르친 대로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기의 경험이나, 봤던 책들,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을 첨가해야 발전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런 자세가 중요하지요.
(제이선생님) 공감 가는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이 빨리 더 좋아지셔서 강의 활발하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백민선생님) 그런데 또 이렇게 인터뷰하다 보니까, 지금 더 살아나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이게 하다 보면, 이렇게 살아납니다. 좀 신명이 나야죠. 공부든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 그런데 ‘국제 역학 대회’라는 것이 있던데요. 저는 역학의 영역에서 국제적으로 이렇게 큰 무대가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이 대회가 어떤 대회인지에 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백민선생님) 제가 이 공부를 하고, <사단법인 한국 영리 학회> 또 <사단법인 한국역술인협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잘 아는 선배님께서 가입을 권유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당시의 전설 같은 선생님들을 소개해주셨어요. 그 덕분에 많은 덕을 봤죠.
당시 초대 회장님이 청옥 지창룡 회장님이셨어요. 그분이 1984년도에 한국, 일본, 대만의 역술인들과 모여 교류를 약속하셨지요. 논문도 발표하고 친목도 도모하자고 시작한 것이 국제 역학 대회입니다. 84년도에 시작했으니 40년이 되었지요. 우리나라가 종주 국가예요. 저는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할 때 외국에서 백 명 이상 참가했는데 초청 방식으로 했어요. 숙박비부터 모든 비용을 제공해 줬어요. 엄청난 비용이 들었죠. 정부 지원은 없었고요. 역술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그 많은 사람을 호텔에 묵게 했지요.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순차적으로 했어요. 저는 88년도부터 참석을 한 거죠.
그다음 해인 89년도에는 일본에서 했어요. 일본 ‘고도역단’이 주최해서 일본 시지오카시에서 열렸지요. 한국 대표로 제가 참석했지요. 다음에 대만, 싱가포르 이런 식으로 나라마다 돌아가며 주최를 맡았지요. 교육계통이나 학계에 있는 선생님들도 계시기는 했지만 주로 참가하시는 분들이 현업을 하시는 분들이었지요. 매년 돌아가면서 나라별로 개최하고 교류하며 학문을 나누었지요. 상담 내용을 기술한 것도 많았지만 아주 훌륭한 논문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던 것이 근래 3년 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개최되지 못했지요. 34회까지 개최했습니다. 지금은 대만분이 의장을 하시고 제가 사무총장 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2024년 하반기에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대만과의 관계 때문에 중국은 처음부터 함께하지는 않았어요. 중국은 그 이후에 2000년대 들어 가담했어요. 중국 측에서 대표단도 많이 옵니다. 연변 지역학회 같은 경우는 우리 조선족들이 많습니다. 중국은 워낙 인구도 많고 땅이 넓으니 학회가 많아요.
(제이선생님) 우리나라 같은 경우 여러 선생님의 노력으로 명리학이 양지로 많이 드러났다고 보입니다. 물론 여기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게 학문이냐 이렇게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서 명리학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백민 선생님) 일본에는 현재 학위 과정이 없어요. 학사, 석사, 박사의 학위 과정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대만에도 없고요. 일반대학에서 물론 풍수 등을 할 수는 있지만요. 중국은 더욱이 그런 부분이 어렵지요. 그래서 일본 선생님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또 부러워하신다고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 출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상담은 마음껏 하지요. 제가 볼 때 중국의 역학계는 우리나라 10년 전, 20년 전 상황을 보는 것 같아요. 행사, 자격증 위주이지요.
대만에는 명리학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어요. 물론 우리나라와 같은 교육과정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대만 책과 홍콩 책을 많이 가져와 공부했지요. 대만은 상당히 많이 발전되어 있어요. 그런데 가장 활성화된 것이 우리나라입니다. 명리학 쪽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술수의 영역도 말입니다.
(제이선생님) 제가 볼 때, 80년대 90년대 하이텔 역학 동호회뿐 아니라 여러 루트를 통해서 역량이 뛰어나신 분들이 이 공부에 많이 참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 공부에 상당한 애착으로 끌어 주신 것 같습니다.
(백민 선생님) 그런 것들이 대중화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지요. 통신 기술 발달과 더불어, 그 당시 젊은 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지요. 이것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데 있어 하나의 분명한 계기가 되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이선생님) 이야기 나누는 중 '하이텔 역학 동호회'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명리 교육은 1대 1로 스승님 모시고 공부하는 도제식 교육이었다면, 그 이후의 교육은 또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두 시절을 모두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정보화 시대 이전과 이후의 명리 교육의 차이점과 그렇게 흘러온 우리나라 근현대 명리학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백민 선생님 ) 정보화 시대 이전과 이후는 상상 못 할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지요. 제가 처음 공부 시작할 때는 자료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70년대 말에 제가 공부를 시작했으니까요. 서점에 가면 명리학 계통의 책은 몇 권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지요. 출판사도 '명문당', '동양서적' 이렇게 두어 군데 정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책이 없었지요. 대만 서적을 번역하거나 편집해서 나온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무렵, 자강 이석영 선생님께서 한일 영리 학원을 운영하시면서 교재로 쓰셨던 <사주첩경>이라는 책이 있었지요. 그 책은 지방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어요. 복사기도 많지 않던 시절이지요. 무슨 보물처럼 가지고 있는 분이 계셔서 필사라도 하고 싶다고 보여달라고 하면, 잘 보여주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어요. 공부는 하고 싶은데 아쉬웠던 시절이지요. 당시는 그만큼 정보와 자료가 부족했던 시절이라고 보시면 돼요.
(제이선생님) 90년대 이전, 그렇게 자료가 없던 시절에는 명리학이 더 신비롭게 보였겠네요.
(백민 선생님) 그럴 수도 있죠. 정보화 시대 이전에 그런 분위기에서도 이 학문을 음지에서 양지로 내놓으려 시도했던 분들이 있으십니다. 자강 이석영 선생님이시지요. 관인 학원을 운영하셨지요. 당시에는 지역 간 이동도 지금과 같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 지역에 따른 학파가 형성되었지요. 서울 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강 이석영 선생님의 사주첩경파가 있었지요.
이석영 선생님이 쓰신 <사주첩경>이 제가 공부할 때는 7권으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6권으로 정리되어 있지요. 완성을 못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7권은 문답식 사자성어식으로 쭉 정리해 놓은 것이지요. 이석영 선생님은 신살, 격국, 용신도 이야기하셨지만, 억부 즉 신강 신약을 중점에 두시고 강의하셨지요. 그분 제자들이 서울, 경기, 인청 쪽 수도권에 많이 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대전 쪽에는 도계 박재완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책을 집필해서 내놓은 것이 <명리요강>, <명리사전>이지요. 그 선생님께서는 조후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선생님마다 자기가 집중적으로 연구하신 부분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 그분의 영향을 받은 충청권이나 호남권은 박재완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박재완 선생님은 강원도 쪽에서 활동하신 적도 있어서 강원권도 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지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책도 없어서 필사본이 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명망 있는 선생님을 중심으로 그 학문이 퍼져나갔지요. 지금처럼 세계 곳곳의 지식과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요. 아마 젊은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대구, 경북, 부산과 같은 영남권은 역술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습니다. 한국 역학계 주류 유명 인사로 자강 이석영 선생님, 도계 박재완 선생님 그리고 박도사라 불리었던 제산 박제현 선생님이 계십니다. 부산에 박제현 선생님이 계셨고, 대구에는 <사주감정법비결집>이라는 책을 내신 신육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신육천 선생님은 격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지요. 제산 박제현 선생님의 관법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물상을 이야기하시기도 했지요. 명망 있는 선생님이 계시는 지역에 따른 학맥, 학풍, 관법이 형성되는 분위기. 이런 것이 정보화 시기 이전의 분위기였지요.
(제이선생님)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아는 것의 전부인 시절이었겠습니다.
(백민 선생님) 사람이 직접 오가지 않는 이상에는 교류가 크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적 교류가 쉽지 않았지요. 정보를 주고받을 방법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서울 경기 수도권은 억부 중심으로, 충청권 호남권은 조후 중심으로 발전되어 있었지요. 염남권은 격국을 비롯한 물상 중심으로 발전했지요. 꼭 그것만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도제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장단점이 있습니다.
저도 도제식 교육부터 시작했지요. 그런데 저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무리한 사금을 저에게 요구하셨어요. 백만 원을 요구하셨는데, 빚내다시피 해서 갔습니다. 막상 가보니, 공부하는 스타일이나 이런 것이 저와 맞지 않았어요. 공부보다는 내담자를 홀리는 법 같은 것을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손님이 많고 돈도 잘 벌었지요. 환불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생님 밑에 조금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크게 배우는 점이 있었습니다.
뭘 배웠냐면, 내가 만약 선생이 된다면 당신 같이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공부 시작할 때 제가 형편이 어려웠잖아요. 취직도 못 하고. 공부도 뜻대로 안 되었고, 건강도 안 좋아진 상태에서 돈벌이도 없는데 빚을 얻다시피 해서 들어갔는데 그런 경험을 하게 되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절대 나는 나에게 공부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제이선생님) 좌절 가운데서 또 배움을 얻으셨군요.
(백민 선생님) 엄청나게 큰 배움이지요. 평생 그 마음을 지키고 살아오고 있지요. 학문적인 것들을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좋은 선생님들 만나게 되면서 제대로 배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때 제산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촌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스터디그룹이지요. 제산 선생님께서 부산에 계시다가 올라오시면 그 모임에 항상 오셨어요. 역술인들 모임이니까요. 댁에 오실 때마다 우리 모임에 오셔서 한 마디씩 해주시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막내였지요. 흔히 말해 수행 비서 역할을 했습니다. 제산 선생님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제가 담당했지요. 그런 잔심부름할 때가 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지요. 궁금했던 것을 그때 물어볼 수 있었어요. 그 당시 제가 쌍문동에서 사무실을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찾아오셔서 ‘원석아 부산 가자.’ 하시면 함께 가고 그랬지요. 제가 본명이 양원석입니다.
부산에 가면 비행기 표 티켓팅을 제가 하고는 했어요. 선생님 본명은 박광태예요. 호는 제산으로 하시고 이름은 박제현으로 많이 불리셨지요. 그렇게 부산에 가시면 수영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태종사라는 절에 친하게 지내시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절에 가시면 따라가서 같이 자고 오고 그랬습니다. 포항이나 광양 제철 만들 때도 수행 비서처럼 따라다녔지요. 그분 고향이 함양이에요. 함양 집에 명절 새러 가시면 따라가서 선생님 시골 동창들 만나는 것도 보고 그랬지요.
(제이선생님) 아주 가깝게 지내셨네요.
(백민 선생님) 그렇지요. 하지만 그분은 따로 제자를 두지 않으셨어요. 도제식 교육 같은 걸 많이 하지 않으셨지요. 그분은 꼭 서사를 두었어요. 나중에 서사들 중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지요. 갑산 선생님부터 유명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산 선생님은 병환이 있으셔서 오래 계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분이 명리나 역학에 대한 저술이 없으세요. 필사본이라든지 도에 관한 것들은 있지요.
제산 선생님 수업을 보면 요약해서 적어 두시는 것이 있어요. 그런 걸 몰래 복사한 것이 비법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꼭 상담지가 있었어요. 상담할 때 서사가 옆에서 꼭 써주시거든요. 어떻게 풀이하셨는지, 이러한 것들이 정리된 것이 비법이라고 돌아다녔지요. 제가 제산 선생님 따라다니면서 적어놨던 정리 노트가 비법처럼 되어버려서, 한 권에 몇십만 원에 팔리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있을 거예요. 거기에 제가 양원석이라는 도장을 다 찍어 놨어요. (웃음) 제산 선생님 통변 방식으로 상담했던 제 상담지가 또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80년대 이야기네요.
그렇게 도제식으로 공부하다가, 90년대 이후부터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 그대로 정보화 시대가 된 것이지요. PC 통신 들어가면 정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다들 얼마나 목말라 있었겠습니까. 이제 이런 정보를 전국에서 다 볼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 중에 대표적인 활동이 90년대 하이텔 역학 동호회입니다. 그게 정보화 시대로 넘어온 거예요.
(제이선생님) 정보화 시대에는 장점이 많지만 또 단점도 있지요?
(백민 선생님) 그렇지요. 인포데믹 현상이라고 그러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지요. 어떤 정보가 맞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어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마는 특히 명리학의 경우 선생님들이 새로운 학설이라고 내놓는 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접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인 줄 알게 되기도 하지요.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도 하나의 지식 전달 수단인데, 책은 한 번 잘못 쓰게 되면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은 또 거기에 각인이 되어 그것이 진리인 마냥 하다 보면 바로 잡을 길이 없어집니다.
제가 책이라고는 지금껏 <명리학개론> 한 권을 내놓았는데, 이 한 권을 쓰고 나서도 항상 불안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도, 불안해요. 명리학 관련한 책을 읽다 보면 궁금한 점이 생겨서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자에게 물어보면 저자 자신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써놓은 책의 내용을 자신이 몰라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정도이지요. 책을 냈다고 하면, 명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이렇게 자신을 포장하는 식으로 출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인터넷을 보면 과대 포장한 것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 못 포장하면 사술이 되어버리니 그것이 염려되는 것이지요.
(제이선생님) 네, 조금 배워서 크게 써먹으려는 마음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전에 선생님께서 ‘용신’에 관해 이야기하실 때 제가 매우 흥미 있게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격국 용신은 사회적인 것, 억부 용신은 가정이나 성격적 측면, 조후 용신은 건강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간단한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백민 선생님) 명리를 공부하다 보면 가장 많이 말하게 되는 단어가 '용신'이지요. 대부분 용신을 사주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시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제가 상담과 강의 흔히 말하는 강호와 강단을 왔다 갔다 하면서 경험하며 느껴온 바로는 이론과 실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에요. 상담을 오래 하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론상으로는 분명히 이때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요. 실제 상담을 하면서 상당히 딜레마에 빠졌던 여러 경우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이 상황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지 이런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명리를 처음 공부할 때는 억부와 신강 신약을 중심으로 공부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풀리는 사주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산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이 멍청한 놈아' 이러시더라고요. 사주를 하나의 이론, 하나의 용신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길이는 자로 재지만, 몸무게는 저울로 잰다고 하셨어요. 아주 쉬운 말인데 멍해지더라고요. 사주에서도 무엇을 판단하느냐에 따라 관점을 달리 봐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지요.
그래서 격국 용신은 사회적 활동 즉 직장, 사업, 진로, 적성, 진학 등을 볼 때 중심으로 봅니다. 가정적인 부분은 억부 용신을 중심으로 보고, 건강이나 궁합 때를 볼 때는 조후를 중심으로 봅니다. 용신은 하나이고 팔자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회, 개인, 건강으로 용신을 구분하여 용어를 쓴 것은, 90년대 하이텔 역학동호회 수련대회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었어요.
(제이선생님) 저도 선생님께 그 말씀 듣고 굉장히 와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이 사회적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너무 많은 것들과 관계하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백민 선생님) 제가 작년에 투병 생활하면서 병원에 가보니, 전부 암 환자이던데요. 그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건강이라고 이야기해요. 돈 아무 소용없다, 명예 아무 소용없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사업에 망하고 신용불량자로 쫓기다시피 지낼 정도로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콩팥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돈이 최고라는 말이 나오지요. 또 권력에 크게 당해 본 사람은 권력이 최고라고 하기도 하지요. 이런 식으로 개인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가 달라집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명리도 너무 고정된 틀 안에서 짜 맞추듯이 하면서 얽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이선생님) 유연한 사고를 지녀야 명리학이라는 이 공부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백민 선생님) 그렇지요. 자연의 이치와 더불어서 명리가 있는 것이니까요. 고정의 틀 안에서 보면 헤어 나오지를 못하지요.
(제이선생님) 제시된 커리큘럼이나 이런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나간 이후에, 공부에서의 자유를 말할 수 있겠지요?
(백민 선생님) 당연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기본을 다지지 않고 공부를 이어나가는 것이지요. 기본적인 이론 체계를 제대로 공부한 뒤에 통합할 때, 그런 유연성을 가지고 융합을 시킬 수 있습니다. 기본적 이론 체계를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 오늘 너무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명리학 개론> 책에서 제가 밑줄 그은 부분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나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 문장 옮겨 써서, 제 책상 앞에 딱 붙여놨습니다. 이 공부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