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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고기는 세상을 화해시킨다

고베의 고베규

by 카미유

한국인이 많이 찾는 교토와 오사카가 위치한 일본 간사이 지역은 내게도 열 번 넘게 갔을 정도로 익숙한 여행지다. 늘 저가 항공에 캐리어도 없이 혼자 짧게 다녀오곤 했는데 2017년 봄 모처럼 지인 둘과 동행하게 되었다. 한 명은 남자 선배 다른 한 명은 여자 후배였다. 벚꽃 시즌이라 어지간한 호텔은 예약이 진작에 찼고 비교적 저렴하게 나온 오사카의 한인 민박을 숙소로 잡았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오사카 여행이 처음이라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경험 많은 내가 가이드 역할을 맡아주길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입국 후 숙소 열쇠를 받기 위해 주인이 있다는 근처 식당에 갔더니 젊은 한국인 점원 한 명만 있었다. 그는 예약 바우처를 확인한 뒤 열쇠를 건네주고 다시 제 일을 하러 주방에 들어갔다. 셋이 쓰기엔 방이 생각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예상한 거라 그러려니 했는데 화장실로 시선을 돌리자 우리는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화장실 출입문이 없었고 그 자리는 얼핏 봐도 대충 가져다 붙인 커튼 한 장만 나풀거리고 있었다.

- 오빠, 일본은 화장실이 원래 저래?

그녀는 본인이 묻고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다. 같은 남자만 있다면 모를까 여자 후배에게 저 상태로 쓰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전에 대체 어떻게 화장실 문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 식당으로 다시 갔고 때마침 주인도 함께 있었다.

- 저기 죄송한데 어제 숙박한 손님들이 문을 부셔놓고 말도 없이 가버려 저희도 난감하답니다.

- 아니 그렇다고 저희더러 문 없는 화장실을 쓰라는 겁니까?

- 업자에게 연락하긴 했는데 오늘 바로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나는 기가 차서 더 거세게 따졌다. 평소 클레임 문제에 관대한 편이지만 이건 선을 넘은 것이다. 남녀가 같이 온 여행지에서 문 없는 화장실을 쓰라니. 둘은 일단 시내 관광부터 하고 이 문제는 저녁에 다시 오자며 흥분한 나를 달랬다. 문을 부수고 튄 숙박객은 당연히 한국인이었다. 남의 나라 여행 와서 이런 짓 하는 놈들을 보면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화장실 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나와 달리 두 사람은 동요하지 않고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오사카를 처음 온 그들에게는 화장실 문이 어떻건 1분 1초의 여행 시간이 더 중요해 보였다. 오사카성을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때마침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 문 고쳐놓았으니 가서 확인해보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저녁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보니 문이 아닌 나무 자바라를 임시로 설치해놓았다.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어쨌든 안이 비치지 않아 그녀도 괜찮다고 하길래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음날 교토 관광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식을 사서 숙소로 가는 길에 그 젊은 점원이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 사장님이 전해 드리랍니다. 받고 마음 푸시라고요.

점원이 건넨 봉투에는 우리가 예약한 하루 치 숙박비가 들어있었다. 굳이 이럴 것까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 문제로 날린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아니야 이 정도는 받아도 되지....로 전환되었다.

- 우리가 진상 부리니 이런 거 아닐까?

- 진상이라뇨. 그 정도 항의도 못해요? 자기도 미안하니까 준 거겠죠.

- 숙소 후기에 악플 달까 겁나서 그럴 수도 있지.

제각각 의견이 달랐지만 적지 않은 돈이 굴러들어온 점에서는 모두 만족했다.


우리는 이 돈으로 뭘 할까 고민했다. 내일이 출국이라 남은 시간은 반나절밖에 없었다. 둘은 근처에서 기념품이나 몇 개 더 사자고 했지만 순간 내 머릿속 전구가 반짝였다.

- 우리 고베규 먹으러 갈까요?

- 고베규가 뭔데?

- 일본의 고급 소고기 스테이크인데 저도 비싸서 아직 못 먹어봤어요. 이 돈이면 얼추 맞을 것 같은데.

평소 여행 중 식도락에 투자를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다. 특히 일본은 가성비 좋은 먹거리가 넘쳐나 굳이 비싼 음식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공돈도 생긴 참에 입 호강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은 계획 같았다.


다음 날 오전 우리는 고베규 맛집을 찾아 고베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한눈에 봐도 고급진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에 착석해 고베규 3인분을 주문했다. 인당 130g 밖에 되지 않아 양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여기는 배를 채우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반질반질 닦아놓은 철판을 사이에 두고 셰프의 기계적인 손놀림이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그는 고기와 야채를 자로 잰 듯 정확히 삼등분으로 나눠 각자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첫입이 들어가는 순간 육질의 부드러움과 식감에 감탄해 다들 말문이 막혔다. 그간 가격과 명성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친 음식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니들은 대체 어떤 소를 잡았길래 이런 천상의 맛이 나오는 거니?


출국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짐을 찾아 간사이 공항에 도착. 수속을 끝내고 여행 후기를 교환하던 중 마지막 식사로 고베규를 택한 건 신의 한수였다는 만장일치 결론을 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먹는 거에 진심인 사람이었나.

- 주인이 정말 고맙고 양심적이네. 그 돈 없었음 평생 고베규 맛도 못 봤을거 아니야.

- 아니 언제는 악플 다는 게 겁나서 그랬다며?

이럴 때 보면 인간이란 참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한 존재다. 고베규 하나에 이렇게 태세전환이 가능하다니. 본래 여행지에서 겪는 친절과 불편은 평상시보다 확대 재생산되는 법이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간사이를 여행하면 화장실 문과 고베규가 떠오르니 이 정도면 제법 기억에 남을 여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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