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야기
지금의 40대 이상은 30년 전 MBC에서 방영된 아들과 딸 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할 것이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의 현실과 비판을 테마로 40%가 넘는 시청률 속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었다. 최수종 김희애가 연기한 이란성 쌍둥이 귀남이 후남이를 축으로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했던 인상적인 작품이라 지금도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지독하리만큼 남녀 차별에 사로잡혀있는 쌍둥이들의 엄마를 리얼하게 연기한 정혜선 씨가 생각이 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 드라마를 봤다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식을 차별할 수 있을까 경악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현실에서는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성자는 주말 저녁마다 드라마 아들과 딸을 즐겨 보았다. 원래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들과 딸은 재방송까지 일일이 챙겨볼 정도로 열혈 시청자였다. 대학을 합격하고 느긋하게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그해 겨울, 우리 형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큰고모 집에 놀러갔다. 성자와 영훈은 모두 육남매를 낳았는데 아들이 넷이고 딸이 둘이었다. 큰고모와 작은 고모는 사이좋게 한 동네에 살았는데 성자와 영훈이 온다는 말에 작은 고모도 아이들을 데리고 큰고모집을 찾아왔다. 애와 어른이 떼로 뒤섞인 집은 하루 종일 북적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고모들의 설거지 하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성자가 아들과 딸을 봐야 한다며 티비를 켜라고 지시했다. 8시가 되려면 시간이 꽤 남았지만 옆에 있던 고모부는 리모컨을 MBC에 맞춰놓고 방송을 기다렸다. 곧이어 부엌에서 고모들이 돌아와 자리를 잡았고 우리 형제도 옆에 같이 앉아 아들과 딸을 시청했다. 정확한 장면은 기억 안 나지만 아마도 정혜선 씨가 후남이 김희애를 구박하는 장면에서 작은고모가 대뜸 성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엄마요, 우리 클 때 저렇게 했소 안했소”
“내가 언제 그랬노”
“했잖아. 엄마는 왜 해놓고도 안했다 그러는교”
작은 고모의 말투에는 불만이 몇 스푼 담겨있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도 아이 셋을 키울 만큼 나이도 들었고 지금 와서 잘못을 따지기보다 단지 성자의 자백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가시나 이거 와 이라노? 안했다는데”
“잘못했소 안했소 그거만 말해보소”
큰고모가 그만하라고 말했음에도 작은 고모는 전혀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자가 고집을 꺾고는,
“그래 내가 그랬다. 니 대학도 안 보내고 아들래미들만 이뻐했다. 인제 됐나? 그래도 저 할마시처럼 독하게는 안했다”
“내도 안다. 엄마는 저래 못되게 안했지”
작은 고모는 듣고 싶던 대답을 들었는지 그제야 웃으며 성자의 어깨를 조곤조곤 주물렀다.
성자의 얼굴에서는 그래 내가 아들과 딸 차별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식으로 심통이 묻어났지만 작은 고모의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본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삼촌들에게 주는 애정만큼 고모들에게 베풀지 않았다는 걸. 나는 성자의 지난 과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차별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넘겨들은 얘기로는 자라면서 작은 고모의 서운함이 많았던 걸로 보인다. 영훈을 닮아 온화하고 순종적 성향의 큰고모와 달리 작은고모는 얼굴도 예쁘고 자유분방하며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을 보내지 않았고 학창시절 성자에게 혼도 많이 나며 자랐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후남이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작은 고모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자식들과 달리 성자는 손자 손녀간의 차별은 거의 없었다. 물론 아주 없었다고는 말 못하지만 확실히 한 세대를 건너뛰게 되면 그만한 거리감을 장착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드라마 아들과 딸을 보면서 이뤄진 이 모녀의 어설픈 화해 과정이 우습지만 조금 찡하기도 했다. 요즘처럼 드라마가 풍년인 시절에 성자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