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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Oct 25. 2023

흔들그네에 담긴 의미

영훈의 이야기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 3대는 한 동네의 여러 집들을 순례하며 이사를 다녔다. 그 중 빨간 벽돌 2층 집은 기억이 온전히 살아있는 사실상의 첫 번째 집이었다. 동네에서 흔치 않은 멋들어진 신식 양옥으로 지어졌고 진녹색 대문의 사자 문고리를 밀고 들어가면 양쪽으로 녹색 풀들과 화분이 줄지어 있는 긴 마당이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3개의 방이 있는 2층에 세를 들었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략 3년을 살았다. 주인아저씨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고 주인아줌마는 영희라는 5살짜리 딸이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영희 엄마로 통했다. 나이가 어린 아줌마는 엄마에게 언니라고 불렀는데 두 사람은 같이 장도 보고 아줌마 집 마루에서 종종 수다를 떨었다. 세를 들어 살고 있지만 나는 이 집이 완벽한 우리 집이라 믿었다.

     

형과 나는 영희를 불러내서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내가 찬 축구공이 마당에 있던 영희네 집 큰 화분을 깨뜨렸다. 밖으로 나온 아줌마는 산산이 조각난 화분과 흩어진 흙덩이들을 보는 순간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겁이 나서 잘못 했어요 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자 아줌마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더니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아줌마가 보는 앞에서 우리 형제를 호되게 나무랐고 그럴 필요 없다는 아줌마의 말에도 화분 값을 변상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엄마는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하다 싶을 만큼 간섭을 했다. 공놀이 금지는 물론이고 방에서 뛰기만 해도 야단을 쳤고 영희와 같이 노는 것까지 막았다. 자꾸만 뭘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니 한창 뛰어 놀고 싶은 사내아이 둘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그 즈음 영훈이 마당에서 영희와 함께 있는 모습이 한 번씩 눈에 들어왔다. 둘이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영훈과 영희는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스스럼없어 보였다.

      

어느 날 영훈은 동네 고물상에서 주워왔는지 철재와 목재를 한 가득 가져오더니 2층 베란다에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물어보자 그는 그네를 만든다고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영훈이라 뭘 만드는 그림은 익숙하지만 그네는 뭔가 뜬금없었다. 형과 나는 영훈에게 그네를 만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네는 영희를 위한 것이었다. 며칠간의 작업을 거쳐 드디어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흔들그네 의자가 완성되었다. 이후 영희는 수시로 2층에 올라와 그네를 타며 우리와 함께 놀았다. 영훈은 이후에도 손수 제작한 장난감들을 영희에게 건네주며 환심을 샀다. 얼마 후 아줌마가 2층으로 올라와 엄마에게 직접 물었다. 왜 요즘 애들이 마당에서 놀지 않나요? 봉쇄됐던 1층 마당이 다시 개방되었고 우리는 전처럼 셋이 공놀이를 했다. 그 뒤로 화분과 유리창을 몇 개 더 깨트려 먹긴 했어도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이 넓고 푸른 마당을 마음껏 소유할 수 있었다. 

      

3년 뒤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고 진짜 우리 집을 장만했다. 이제는 확실히 안다. 영훈이 만든 그네는 영희가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걸. 셋방살이라는 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인집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얼핏 친해 보이는 엄마와 아줌마의 관계에도 어쩔 수 없는 상하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영훈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마당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어떨지 몰라도 형과 나에게는 빨간 벽돌집 셋방살이 3년의 기억이 결코 나쁘게 남지 않았다. 그 즐거운 기억의 일부는 영훈의 몫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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