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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Nov 24. 2023

마리아 유치원

성자와 영훈의 이야기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구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마리아 유치원 마리아 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이상은 1970년대 부산의 마리아 유치원 원가인데 얼추 가사는 맞을 것이다. 왜 나는 40년이 넘은 이 곡의 멜로디와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사람의 기억이란 종종 이해 불가한 지점에서 번뜩거릴 때가 있다. 마리아 유치원의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에서 따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은 형이 다닌 곳이고 정작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혹 형만 유치원에 보낸 서운함이 맺혀서였을까. 하지만 그땐 유치원을 가는 아이보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 가기보다 집에 있는 걸 좋아했던 내 성향으로 미루어볼 때 유치원을 보내줬다 해도 썩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맘에 걸렸던 점은 부모님이 나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은 이유였다.

"니는 똑똑해서 유치원 안 가도 된다. 거기서 배울 것도 없다."

당연히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내가 기대만큼 똑똑하지 못했던 건 둘째 치고 그럼 형은 멍청해서 유치원에 보낸 건가. 아니, 애당초 유치원이라는 데가 뭘 가르치는 기관은 아니지 않나. 옆에서 지켜보던 성자와 영훈은 유치원의 무용성에 재차 쇄기를 박았다.

" OO이 갔으면 됐지. 둘 다 보낼 필요가 뭐 있노."

그때 나도 유치원 보내달라고 떼를 썼으면 충분히 통했을 수도 있었다. 늘 그렇듯 노인은 아이를 이기기 힘든 법이다. 그러나 나는 유치원을 가지 말라는 말에 그냥 ‘응’ 하고 답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나거나 속상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고 허전했다. 암만 해도 형이 장남이기 때문에 유치원에 보내줬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별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가족 모두 한 목소리로 저러고 나니 되러 관심 없던 유치원이 가고 싶어졌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가고 싶다고 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유치원 입학 시기도 지났고 몇 달 뒤면 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니까.

     

그해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부모님은 밖에 나가고 형은 학교에 가서 집안에는 성자와 영훈 나 셋 밖에 없었다. 거실 한편의 잡동사니 박스에서 형이 입던 유치원 옷과 물품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나는 방 안으로 가져와 방바닥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포장이 벗겨지고 동강난 크레파스, 연필 때가 잔뜩 묻은 지우개, 집계 부위가 녹슨 그림 합판, 마리아 유치원이 새겨진 가방과 끈 달린 모자. 그리고 형이 입던 노란색 상하의 유치원복. 하나씩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데 성자가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혼자 유치원 놀이를 하는 모습이 앙증맞아 보였는지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니도 한번 입어 보거라."

나는 창피함에 잠시 주춤거렸지만 노란색 유치원복을 내미는 성자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스타킹을 신고 바지와 윗도리를 입었다. 옷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마냥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맞았다. 모자와 가방까지 맞춰 거울 앞에 서니 영락없는 마리아 유치원생이 되었다.

     

며칠 뒤 성자와 영훈은 나와 형을 데리고 집 근처에 있는 충렬사로 나들이를 갔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호국 선열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아이들의 소풍 장소로도 애용되던 곳으로 내가 유치원복을 꺼내 입었다는 얘기를 들은 영훈이 제안한 것이었다.

"OO이는 유치원 소풍도 못 갔는데 가봐야지."

그날 마리아 유치원생 복장을 한 이 7살 아이는 충렬사의 가파른 계단들을 힘든 줄도 모르고 제일 먼저 올라갔다. 내려와서 돗자리를 펴고 네 사람은 적당한 가을바람을 맞아가며 김밥과 과자를 나눠먹었다.

“유치원 그래 가고 싶더나? 인자라도 보내주까?”

"아이다 할머니. 안 가도 된다."

"진짜 괘안나?"

"진짜 괘안타. 안 갈 거다."

"학교 가면 공부 열심히 하거라."

"야는 말 안 해도 잘할 거요. 당신은 걱정하지 마소."

마리아 유치원생 1일 체험 이후 유치원복은 다시 입지 않았다. 이듬해 봄 나는 안락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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