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이야기
초등학교 소풍날 새벽이면 익숙한 풍경 하나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어머니가 조도 낮은 형광등 불빛 아래 김밥을 만들고 있는 모습. 들뜬 맘에 잠을 설친 나는 해가 뜨기도 전에 부엌으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따로 챙겨둔 김밥 꼬다리를 집어 한껏 벌린 내 입에 넣어주었다. 소풍날이 아니면 먹기 힘든 어머니의 김밥은 언제나 맛있었고 양은 도시락 뚜껑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옆에서 김밥을 우물거리며 먹었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소풍 도시락의 한 끼는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걸 많이 챙겨왔어도 김밥이 없다면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나는 소풍날만 되면 절로 으슥해졌다. 어머니의 김밥은 소시지, 단무지, 시금치 등의 기본 재료만으로 말린 다른 애들의 김밥과 달리 계란지단과 맛살이 추가되고 깨까지 곱게 뿌려져 있는 특 상품이었다. 다채로운 빛깔부터 시선을 사로잡았고 짭조름한 간이 적당히 배어있는 김밥은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나는 부러 먹어보라 권했고 맛있게 먹는 그들을 보며 야릇한 우월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머니의 김밥은 초등학교 3학년 봄 소풍이 끝이었다. 그해 가을부터 어머니는 긴 투병 생활에 들어갔고 가사의 주도권은 성자에게 넘어갔다.
나는 그전까지 성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살림은 어머니 혼자의 몫이었고 그녀는 차려놓은 밥을 아귀 같은 큰 입으로 쑤셔 넣기만 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할머니의 손맛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 성자가 마냥 못마땅했고 어머니의 병이 마치 성자의 탓이라도 된 양 은근한 적개심마저 품었다. 당연히 김밥 같은 걸 만들어 본 적 없는 성자는 가을 소풍날이 다가오자 한 고급 일식집에 김밥을 주문했다. 화려한 일식 데코레이션의 김밥은 여느 김밥에 들어가지 않는 재료들이 많았고 크기도 한 입에 넣기 부담스러울 만큼 컸다.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성자는 다음날 아침까지 김밥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지 뚜껑을 덮은 뒤 바깥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소풍 당일 처음 보는 일식집 김밥에 호기심이 동한 아이들의 젓가락이 연갈색 나무 박스를 헤집는 동안 나는 단 한 점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빈 박스를 버리지 않고 성자에게 보란 듯 내보였고 다 먹은 걸 확인받은 그녀는 어린 손자 앞에서 기쁨의 신호를 온전히 다 드러냈다. 해가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성자의 일식 김밥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되풀이되었다.
그때의 행동과 감정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긴 쉽지 않다. 어쩌면 어머니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감을 어떤 식으로든 분출하고 싶었던 나는 안전한 미움의 대상으로 성자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가족의 입장에서 떨어져 보자면 그녀는 교양 없고 이기적이며 감정을 제멋대로 분출하는 사람이었다. 온화한 성품에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가족 친지들 사이에서 성자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흠이 많은 사람을 미워하는 데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삐뚤어진 마음은 제멋대로 확장되었다. 며느리를 구박하는 못된 시어머니, 가장(家長)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 무식하고 탐욕 넘치는 늙은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열 살 소년을 이 노인네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훗날 철이 들고 나서야 깨달았다.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말던 어머니의 마음과 베란다에 놓아둔 김밥의 냄새를 맡던 성자의 마음이 다르면 얼마나 달랐을까. 적어도 그녀는 돈으로 내 마음을 사려는 얄팍한 인간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해도 속으로는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는 열 살 소년의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훗날 저승에서 성자를 만난다면 꼭 사과하고 싶다. 할머니, 나 사실 그 김밥 하나도 안 먹었어. 너무 미안해. 그래도 성자는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아~그랬냐며 허허 웃을 것이다. 내 할머니 성자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