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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Feb 28. 2024

프로그래머 4화 (잘못된 선택의 전조)

삶이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에서 늘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고 정답인지 오답인지를 시간이 지나야 판단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삼성카드에서 1년이 조금 넘게 일했고 CTI 개발 프로젝트는 무사히 끝이 났다. PM은 다들 고생했다며 개발자들을 전부 불러 거하게 회식자리를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힘든 일은 초기 개발 인력들이 거의 다 했고 나처럼 뒤늦게 투입된 사람은 숟가락만 살짝 얹은 셈이라 고생이라 말하기는 다소 민망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도 신입 멤버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마무리가  만족스러웠다.

      

이제 다음 목적지를 향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보통은 본사로 복귀해 다음 프로젝트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일부는 기존의 클라이언트 업체와 연장계약을 맺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기 얼마 전 PM은 몇 명의 개발자들을 따로 불렀는데 나도 거기에 해당되었다.

“삼성카드 측에서 여러분과 재계약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유지보수 체제로 들어선 만큼 가능한 기존 개발인력 중 몇 사람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데 생각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쪽에서 선택한 만큼 대우도 괜찮을 거고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며칠 안에 답을 달라는 말에 일단 생각을 해보겠다 말했다. 아직 경험을 쌓아야 하는 신입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1년 남짓이지만 현장 개발 경험이 있다는 건 적지 않은 메리트였고 그만큼 경력을 쌓아가는 데 있어 부담이 덜한 자리였다. 하지만 나는 고심 끝에 거절했다. 제안을 받았던 사람 중 거절 의사를 밝힌 건 내가 유일했다. 비슷한 업무를 또 해야 할 것 같아 맘이 끌리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다른 프로젝트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본사로 돌아와 일종의 대기발령 상태가 되었다. 본사에서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만 때웠다. 언제 일할 수 있냐는 질문에 사장은 일단 기다려보라는 말만 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예전의 해이함이 되살아났고 몹쓸 자만심마저 차올랐다. 어떻게든 취업만 되면 감지덕지라던 초심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다시 예전처럼 놀고 싶었다. 일도 없는데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나? 첫 직장이라 긴장했는데 막상 해보니 별 거 아니잖아.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좀 더 즐기다 나중에 다시 취업하면 되지 않을까? 한낮 풋내기 주제에 나는 뭐라도 된 양 직장과 사회생활을 만만히 보기 시작했고 얼마 뒤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그 뒤로 약 6개월 간 내키는 것들을 마음대로 해가며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좋아하는 영화와 스포츠 관람을 거의 매일 즐겼고 종종 연극, 뮤지컬, 콘서트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그동안 얇은 지갑과 무너진 자존감으로 만남을 꺼려했던 지인들과 재회해 술을 마시고 쌓여있던 울분을 맘껏 풀어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이제야 사는 맛을 좀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해가 바뀌고 모아뒀던 돈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다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때마침 같이 일했던 조 대리에게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카미유씨 요즘 어떻게 지내요?”

“그냥 머리도 식히면서 뭐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

“다시 일 시작해야죠?”

“아, 네....”

“이번에 삼성카드에서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는데 카미유씨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요. 개발자만 100명이 넘게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라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나 봅니다. 아직 초기 단계이고 카미유씨는 여기서 일해 본 경험도 있고 해서.... 어때요, 참여해 볼 생각 있어요?”

역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한때 스승으로 모시던 조 대리가 직접 연락을 주었다. 딱 적재적소의 타이밍에 일하자는 제안을 받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단번에 승낙했고 1년도 안 되서 다시 삼성카드로 찾아갔다.

        

그 사이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한 조 과장을 만나 차를 한 잔 마신 뒤 인사 담당자를 만나  급여 협상을 하고 계약서를 썼다. 제시한 급여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라 따로 협상이랄 것도 없이 바로 도장을 찍었다. 그런 다음 일하게 될 사무실로 이동했는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흠칫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근무했던 익숙한 곳이지만 공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무실의 책상 배치부터 시작해 현업 담당자와 본사직원들이 있던 자리 모두가 개발인력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의 대부분 말없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자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충 세어 봐도 50명이 넘었다. 조 과장을 포함해 지난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사람이 세 명 있었는데 모두 과장 급 이상이었다. 대충 훑어봐도 나 같은 평사원급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설렁설렁 만만하게 왔는데 이들을 보자 자신감이 순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뭔가 불길한 낌새가 풍겼지만 지난번처럼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얼마 뒤 나는 뼈저린 현실을 깨닫고 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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