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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27. 2024

여명 – 절망과 희망 사이

두 번째 훈련에는 12명이 모였다. 첫 훈련보다 인원이 많이 늘었지만 2학년 선배 한 명과 장비를 빌린 전기과 두 명이 게스트로 포함된 거라 비약적인 증가라고 볼 순 없었다. 청백전을 치르기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포지션을 다 채울 만큼의 인원이 모였다는 점은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6명씩 두 팀으로 나누고 부족한 3명의 포지션은 상대편 선수가 대신 수비를 하는 방식으로 모의 시합을 진행했다. 경기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야구라는 종목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위용을 뼈저리게 느꼈다. 야구는 여타 구기 종목에 비해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초보자의 기술적 진입장벽은 대단히 높은 종목이다. 축구나 농구는 플레이어가 아무리 후져도 열심히 뛰다 보면 얼추 점수도 주고받으며 경기가 진행이 된다. 하지만 야구는 초보자들이 할 경우 한 이닝에 10점 이상 나는 건 예사고 시간제한이 없는 만큼 이닝 교체 간격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야구가 생활스포츠로 자리 잡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3이닝 만에 양쪽 다 20점을 넘어섰고 어차피 9이닝을 채울 거란 기대는 안했지만 스코어만 보자면 이게 야구인지 핸드볼인지 농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박수도 치고 파이팅을 외치던 선수들은 경기가 한없이 늘어지자 긴장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실수가 반복되다 보니 기운이 빠지고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배트 돌리는 꼬라지 봐라. 아주 똥을 싼다 싸.

-  지랄한다. 공을 보랬더니 어디를 보고 처 자빠져.

-  저 자식은 무슨 말이 졸라 많아. 야구를 입으로 하고 앉았네.

그 와중에 전기과 용병 둘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압도적인 남자 신입생 숫자에서 선발된 선수라는 걸 감안해도 레벨 자체가 다르고 우리 같은 유사 공대가 아닌 정통 공대의 위엄과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어차피 승패에는 관심이 없고 싹수가 보이는 선수를 발굴하는 게 이번 훈련의 큰 목적인데 운 좋게도 될성부른 떡잎 을 건져내며 희망을 보았다. 무엇보다 지난 훈련에 나오지 않았던 승완과 태준은 이 혼돈의 그라운드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승완은 피칭 시 하체를 활용해 스트라이크를 꽂을 수 있는 1선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태준은 두 번이나 배트 중심에 타구를 맞춰 큼지막한 타구를 날렸고 무엇보다 미트 질 감각이 탁월해 유격이나 1루를 맡길 만한 재목이었다. 이번에도 해가 질 시간이 다가왔고 끝내 5이닝을 넘기지 못한 채 경기가 중단되었다.


한편 성훈은 락희와 이어달라는 나의 지속된 성화가 거슬렀는지 학생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를 만들었다. 락희는 친구 한 명과 같이 나왔는데 보자마자 나는 그녀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예쁜 주인공 여자 옆에서 못생기고 괄괄한 친구가 초 치고 판을 엎는 경우가 있다.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는가. “항상 젤 못생긴 친구가 훼방을 놓지~” 다행히 락희와 함께 나온 애는 그리 못생기지도 않았고 훼방을 놓지도 않았다. 그녀는 학교 근처 덮밥집에서 저녁에 알바를 했는데 우리끼리 있을 땐 그녀를 덮밥이라 불렀다. 성훈은 제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말없이 밥만 먹었고 나는 식사를 끝내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헤어질 때까지도 락희에게 대화다운 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기껏 알아낸 거라곤 사는 동네 이름과 좋아하는 티비 프로, 사귀는 남친이 아직 없다는 정도뿐이었다.

- 내가 보기엔 덮밥도 괜찮아 보이던데.

민재는 락희 앞에서 어버버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는지 뜬금없는 부채질을 하며 화를 돋구었다.

- 왜? 덮밥한테 관심 있냐? 그렇게 좋음 니가 대시해보던가.

- 내 타입은 아니지.

타입? 지금 니 처지에 타입을 따져?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취향이라는 건 있다지만 덮밥 정도면 민재는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 이후 나는 전형적인 찌질이 짝사랑 모드가 발동되었다. 같이 듣는 교양 수업 때 슬그머니 근처에 앉아 인사를 한 다음 락희 쪽을 힐끔힐끔 보면서 딴 생각에 젖은 채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인간이란 소유하기 힘든 것일수록 환상과 갈망이 더 커지는 법이다. 시간이 갈수록 평범해 보이던 락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뻐 보였다. 


우리는 두 번의 훈련을 통해 대강의 라인업을 구상했다. 중요한 포지션 몇 자리는 의견일치를 보았고 나머지는 다음 연습을 통해 확정하기로 했다. 확실한 건 민재의 유격수 자리와 나의 중견수 자리는 같이 날라 갔다는 거다. 그날 이후 셋이 덮밥이 일하는 가게에 자주 들렀다. 혹시 락희에 관해 뭔가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간 거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 집의 카레덮밥은 싸고 맛있었다.

- 락희? 도서관에 있을 걸. 곧 중간고사잖아. 나도 다음 달까지만 하고 그만 둘 거야. 유전과는 중간고사 언제부터야?

셋 다 중간고사 그딴 게 뭔데 라는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덮밥은 아직 우리가 학과 공부와 담 쌓은 인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녀는 처음엔 우리를 반겼지만 두 번째부터는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매상을 올려봐야 시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니 알바 입장에서는 손님이 없을수록 편한 거 아니겠나. 

- 니들은 맨날 붙어 다니는데 별로 안 친해보여.

덮밥의 말에 잠깐 그런가?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친한 거 맞고 만일 얘들이랑도 안 친하면 학교에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격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주 보면 없던 정도 쌓인다고 나는 덮밥의 가게에서 이렇게 덮밥을 먹다 혹 덮밥을 좋아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 이왕 할 거 기계과나 전자과 같은 강팀이랑 함 붙어보자.

첫 공식 시합을 어느 과와 붙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던 중 민재는 주제도 모르고 막말을 내뱉었다.

- 단체로 망신당할 일 있냐. 처음인데 어느 정도 수준이 맞는 데랑 해야지.

- 우리랑 수준이 비슷한 과가 있을까?

애초에 공대 과들은 우리 같은 초짜 팀을 시합 상대로 받아줄 리 없었다. 만만한 야구팀이 있는 과를 찾아야 되는데 생각보다 고민은 금방 해결되었다. 사랑도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는 말이 있듯 가까운 곳에 딱 맞는 상대가 있었다. 같은 단과대 소속의 조경과 야구팀. 조경과는 남학생 수가 유전과보다 더 적고 역사도 2년밖에 안된 팀이라 신생팀이 충분히 겨뤄 볼만한 상대였다. 우리는 다음 날 조경과 사무실로 찾아가 시합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조경과.... 락희가 있는 과.... 락희가 이 시합을 구경 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지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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