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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20. 2024

설렘-잠자리 안경을 쓴 여인

첫 연습이 끝난 그날 저녁 우리 셋은 주점에 앉아 작금의 현실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했다. 구멍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매워야 할지 아무도 해결책을 선뜻 내놓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애꿎은 비난만 쏘아댔다. 

- 넌 어떻게 한 번을 제대로 못 맞추냐. 어렸을 때 야구 많이 해 봤다며?

민재가 먼저 꼬투리를 잡아당겨 시동을 걸자 나도 질세라 발끈했다.

- 그러는 넌 얼마나 잘하는데? 땅볼 처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3번 타자 유격수를 한다고....기가 찬다.

- 야 전성훈 말해봐. 우리 이래 가지고 되겠냐? 

성훈은 담담한 얼굴로 뭐 그런 걸로 열을 내냐며 조용히 우리를 말렸다. 사실 나와 민재 둘 다 상대를 탓하려는 의도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화를 참을 수 없어 그랬다는 편이 맞았다. 공교롭게 우리 둘은 신체적 결격사유로 같이 군 면제를 받았다. 나는 고도 근시, 민재는 체중미달이었는데 남들은 군대 안 가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당사자에겐 가볍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이 점이 운동능력과 큰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순 없지만 왠지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사람 같다는 자의식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음 연습 때는 2학년 선배들도 끌어들이자. 야구에 관심 있는 선배들 찾아보면 많을거야.

- 그래, 일단 머릿수만이라도 넉넉하게 채워놓고 시작하자.

나와 민재는 성훈을 설득했고 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굳이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 스포츠 만화 같은 거 보면 슬램덩크 강백호처럼 알려지지 않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짠하고 나타나던데 혹시 우리 과에도 숨겨진 야구 천재가 있지 않을까?

- 야, 아까 연습하는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나는 민재의 허황된 망상을 단번에 묵살했다. 만화는 만화일 뿐 그런 천재가 여기 있을 턱이 없지. 설령 있다 한들 이런 초짜배기 야구팀에 들어오겠느냐 말이야.

      

이 와중에 우리 셋은 창단 멤버로서 각자의 코칭 보직을 확정했다. 성훈은 감독, 민재는 투수코치, 나는 타격코치. 당연히 적성 같은 건 일절 고려 없이 제 맘대로 쓰고 싶은 감투를 하나씩 가져다 썼다. 당장 선수도 부족한 판국에 코칭스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였다. 우리는 평소 얼굴도 낯선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더블 헤릭스 가입을 권유했다. 말로는 재밌을 것 같네 한번 가볼까? 했지만 말투에서 그닥 신뢰감이 담겨있진 않았다. 우리 역시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맘으로 간 거니 선배들이 오면 좋고 안 와도 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연습 때는 제대로 된 9명이 꼭 모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조경학과 이락희를 알게 된 건 성훈을 통해서였다. 셋이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쓰고 창가 쪽을 무심히 보고 있던 그녀를 성훈이 알은 체를 했다. 둘은 고등학교 연합 동문회를 통해 알게 된 사이로 얘기를 듣던 중 락희가 조경학과 1학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경학과는 유전공학과와 같은 단과대에 속해 있고 공통교양 수업 두 개를 같이 듣고 있어 가깝다면 가까운 관계였다. 락희는 눈에 확 뜨일 만큼 예쁘거나 개성이 강한 마스크는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교양수업 때 그녀를 단박에 주목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철 안 30여분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서 적잖은 매력을 감지할수 있었다. 어깨에 닿을 랑 말랑 한 반듯하게 정돈된 단발.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에 상냥하고 또박한 서울 말씨. 특히 조막만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크고 둥근 잠자리 안경에 유독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저 안경 너머에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결한 것들을 감춰둔 채 어디 한번 찾아보라며 유혹하는 손짓을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지다 이내 정돈되었다. 락희는 우리 과 여자 동기들이랑 확실히 다르구나. 첫 미팅 때 만났던 성신여대 긴 머리 그녀와도 다르구나. 나는 곧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확신했다. 잠자리 안경을 벗고 가을햇살 아래 두 눈을 활짝 노출한 락희의 싱그러운 얼굴을 상상하는 순간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 나 걔랑 별로 안 친해. 관심 있으면 직접 가서 말 걸어보던지.

나는 성훈에게 락희에 대한 관심을 고백한 뒤 남친 여부 및 그녀에 관한 유용한 소스들을 물어봐 달라고 하자 그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조악한 상상모드가 발동했다. 거짓말이야. 안 친한데 그렇게 둘이 자연스럽게 얘기할리가 없어. 분명 특유의 귀차니즘 때문에 신경쓰기 싫은 거겠지. 아니 잠깐만. 혹시 이놈도 락희를 좋아하는.... 민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상대가 민재라면 몰라도 성훈이랑 붙으면 자신 없는데. 모름지기 친구라면 친구의 연애 사업에 발 벗고 뛰어주는 게 정상 아닌가. 좌우지간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락희에 대한 마음이 온몸을 한 바퀴 감싸고 돌 즈음 다음 연습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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