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과와 시합 날자가 확정된 후 나는 틈나는 대로 야구 연습장에서 타격 연습을 했다. 어차피 내가 투수를 하는 일은 없을 테니 타격이라도 잘해보고 싶었다. 동전구멍에 백 원짜리를 넣고 날아오는 공에 힘껏 배트를 휘둘렀지만 공은 좀처럼 제대로 맞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일단 힘을 빼고 배트 중심에 맞추는 거에만 집중했다. 나는 재미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야구 연습장의 공은 정해진 패턴으로만 날아오기 때문에 타이밍만 적응되면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배트에 공이 어느 정도 맞아 나가자 이번에는 투구 스피드를 바꿔서 속도 차에 반응해나갔다. 성훈과 민재는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진 내 태도에 의아해했다. 경쾌한 타격 소리와 함께 정타로 맞아 나간 타구가 그물을 때리는 순간 손목에는 찌릿한 진동이 퍼졌다. 그럴 때마다 락희에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막상 시합이 결정되자 더블 헤릭스 멤버들의 태도는 서서히 달라졌다. 중간고사 기간과 맞물리면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소그룹으로 연습을 했다. 그런다고 없던 실력이 갑자기 불어나는 건 아니지만 연습량이 늘어날수록 점진적으로 향상되는 모습들이 나왔다. 폭투를 남발하던 투수의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아졌고 선풍기만 돌려대던 타자들이 집중력을 장착했으며 수비 역시 두 번 빠트리던 것을 한 번만 빠트렸다. 무엇보다 냉소와 조롱이 지배하고 있던 연습장이 열기와 격려의 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칭찬은 고래뿐만 아니라 더블 헤릭스도 춤추게 만들었고 연습 분위기는 적당한 긴장감 속에 화기애애해졌다. 적어도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특별히 다르지 않았고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음속 불씨를 지펴냈다. 우리는 좋은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선동렬, 장종훈, 이종범 같은 당대 스타 선수들의 이름을 외쳐가며 진짜 야구선수라도 된 것 마냥 허세 가득한 파이팅을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나는 최대한 휩쓸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나에게 이 시합은 유전과 조경의 대결 이전에 락희라는 존재 때문에 더 특별한 시합이었다. 하지만 실전 타격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는데 이는 기계가 던지는 공과 사람이 던지는 공의 성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야구 연습장의 공은 속도가 빨라도 일정한 범위 안으로만 들어오기 때문에 대비가 가능하지만 가뜩이나 제구력이 들쑥날쑥한 사람이 던지는 공은 어디로 날아올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특히 학창 시절 다양한 형태로 공을 맞아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몸쪽 공은 적잖은 공포로 다가왔다. 바깥쪽 공은 어찌어찌 맞췄지만 조금이라도 몸쪽으로 공이 날아들면 절로 움츠려들었다. 수비 역시 마음과 달리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정돈된 잔디가 아닌 울퉁불퉁한 흙바닥은 불규칙 바운드가 예사로 발생했고 그럴 때마다 공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연습이 끝난 뒤 나는 진지하게 주전으로 나서기 힘든 실력이라 판단했다. 물론 굳이 주전으로 나가겠다면 막을 사람은 없겠지만 팀에 손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락희를 보기 위해 조경과 1학년 시간표를 확보한 뒤 첫 수업 전철시간보다 조금 앞서 도착해 학교 앞 역에서 기다렸다. 역에서 락희를 보게 되면 같은 전철을 타고 온 것처럼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그녀에게 우연히 만난 체 하려는 속셈이었다. 역에서 단과대 건물까지는 길어야 10분 정도. 나는 그 10분을 위해 아침시간을 포기했지만 락희와 1:1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이때밖에 없었다. 학교 내에서나 하교할 때는 그녀가 혼자 있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매번 같은 방식으로 하면 의심받으니 마주치는 시간대와 장소를 바꿔가면서 이 만남은 결코 의도가 아닌 우연이라는 걸 강조했다. 분명 락희는 내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 이런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내 연기는 그만큼 어설펐고 그 전에 덮밥이 미리 얘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락희는 이런 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별다른 온도차 없이 나를 대했다. 인사하면 손 들어주고 질문하면 답해주고 가끔 되 물으며 적당히 웃어주는 그냥 그런 사이. 하지만 이대로라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락희가 지금처럼 선을 지우지 않고 솔직하지 않은 자세로 내 연극을 즐기며 계속 속아주는 척 하기를 바랐다.
- 담 주에 우리랑 시합 한다며?
덮밥은 평소처럼 따뜻한 카레덮밥과 소고기 덮밥을 우리 앞에 내어놓은 뒤 물었다.
- 응. 너도 심심하면 구경 와.
- 야구 잘 몰라. 관심도 없고. 우리 과 애들이 잘할지 모르겠네.
그래, 너는 이렇게 덮밥이나 만들려무나. 어차피 락희만 오면 되니까. 중간고사가 끝나갈 무렵 우리 셋은 호프집에 모여 해태와 삼성의 한국시리즈를 함께 보았다. 전년도 챔피언이자 내 응원팀 롯데는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에 탈락해 짐을 쌌고 민재의 응원팀 LG 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라이벌 OB 를 물리쳤지만 한국시리즈 목전에서 삼성에게 패해 역시 짐을 쌌다. 화면 속 프로야구 선수들은 우리와는 다른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운동을 밥벌이로 하는 엘리트 프로 선수들이니 당연한 이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외의 마음은 거둬들일 수 없었다. 저들의 플레이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땀으로 단련되었을까. 며칠 뒤 펼쳐질 우리의 시합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가며 전의를 다졌다.
- 계 속 - (다음 주 '유전 VS 조경' 은 3회차가 한번에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