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중간고사는 지난 학기처럼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을 바탕으로 시험 시간이 한참 남은 상태에서 답안지를 제출했다. 앞면은 그럭저럭 채웠지만 뒷면으로 넘기자 쓸 내용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내 학습 용량은 딱 이 정도였고 성훈과 민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에겐 중간고사보다 한 번이라도 더 훈련을 하는 게 중요했다. 조경과와 시합 날자를 확정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다는 건 합의를 했지만 양쪽 수업이 비는 시간을 찾는 게 여의치 않았다. 1학년만 출전하면 몰라도 2학년까지 고려하니 들어맞는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10월 말이라 6시가 넘어가면 해가 진다는 부담도 있었다. 양측 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날짜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옥신각신했는데 결국 유전 쪽이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이 시합은 우리가 조경과에 부탁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유전과는 2학년 선수가 거의 없어 2학년 수업을 배제해도 타격이 적었다. 대신 그 날의 주심은 유전과 선배가 맡는 걸로 결정되었다. 경기 시각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딱 2시간. 4시 이후엔 유전 조경 모두 전공 수업이 있어 그전까지 경기를 무조건 끝내야만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거기에 맞는 전략을 짜야만 했다. 야구는 9회 쓰리아웃이 되어야 경기가 끝나는, 이른 바 타임아웃이 없는 스포츠다. 하지만 이 경기는 타임아웃이 정해져 있어 끝이 5회가 될 수도 6회가 될 수도 있다. 강우 콜드게임도 아니고 시간제한 콜드게임인 셈이다.
- 무조건 초반에 점수를 많이 뽑아야 돼. 이 시합은 5회 안에 끝날 수도 있어. 스트라이크 존을 좁혀서 꼭 칠 수 있는 공만 건드리고 볼넷으로 걸어 나가는 전략으로 가자.
성훈은 흡사 해태 김응룡 감독처럼 진지한 포스를 뿜어내며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선발투수는 구위가 가장 좋은 승완으로 일찌감치 낙점 지었다. 선발 라인업에서 나는 일단 빠졌고 성훈은 5번 타자 3루수, 민재는 8번 타자 우익수를 맡았다. 심판은 통상 4심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주심만 세우기로 했고 유전과 2학년 현민 선배가 맡기로 했다.
시합이 있기 며칠 전 락희에게 그날 시합은 나도 출전하니 꼭 보러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근질거리던 입은 끝내 침묵했다. 그저 시험 잘 봤어? 축제 때 뭐할 거야? 같은 하등 무의미한 멘트를 던졌고 그에 걸 맞는 영혼 없는 대답만 듣고 말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흡사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주인공 까치에 빙의했다.‘엄지....아니 락희야. 그날 와서 내 멋진 모습을 지켜봐 줘. 너를 위해 야구 연습장에서 동전을 바가지로 쏟아 부으며 피땀 흘린 나를. 엄지는 미친X 이지만 넌 천사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여자잖아.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뭐 이런 멘트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락희가 내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멋진 모습은커녕 삼진 먹고 알 까는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실망하겠는가.
마침내 D-DAY 가 찾아왔다. 적당히 흐린 가을날은 야구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양 팀 출전 선수들은 수업 중간에 빠져나와 사전 준비를 하면서 몸을 풀었다. 2시가 되기 전 출전 선수가 다 모였는데 더블 헤릭스는 수업을 째고 온 2학년 두 명 포함 13 명의 라인업을 구성했다. 조경과 야구팀 레드 샤크도 대충 비슷한 비율과 숫자였다. 레드 샤크라. 음...조경과라면 그린 트리즈, 뷰리풀 가든즈 뭐 이런 게 나와야 되지 않나. 딱 보니 현 프로야구 팀 마스코트 에서 안 쓰는 동물 중 쌔 보이는 상어를 선택한 느낌인데 팀명만 놓고 보면 우리가 압승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더블 헤릭스 로고가 찍힌 단체티셔츠(몇 명은 창피해서 안 입고 왔지만)를 입고 왔는데 반해 조경과는 대부분 평상복 차림이었다. 제각각인 레드 샤크 선수들의 복장을 보면서 저들은 필시 조직력이 약할 거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가질 만 했다. 단체티의 아우라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 수업이 막 끝난 뒤라 관중은 아직 없었고 락희도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창단 멤버이자 미즈노 글러브 기증자인 내가 선발 라인업에서 빠진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름의 다른 계산도 내포하고 있었다. 락희의 관전 여부에 따라 출전 타임을 조율할 수 있고 결정적 순간에 대타로 나와 임팩트 있는 모습을 선보인다면 이야말로 극적인 드라마가 아니겠는가! 조경과의 선공으로 시합은 정확히 2시에 시작되었다. 선발투수 승완은 초구부터 묵직한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