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이 1회초에 2점을 먼저 냈지만 연이은 수비 실수로 인한 것이었고 승완은 흔들리지 않고 삼진 두 개를 잡으며 제 역할을 다했다. 볼넷을 하나 내주긴 했지만 정타로 맞아 나간 타구는 하나도 없었다. 1회말 곧바로 유전은 볼넷과 실책 적시타를 묶어서 동점과 역전을 만들어냈다. 성훈의 작전대로 타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볼넷을 얻어내 루상을 채웠고 태준의 강습 타구가 그라운드를 갈랐다. 4점을 뽑아내고 공격을 마친 유전은 초반 분위기를 선점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1회가 끝난 뒤 예상치 못한 논쟁으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첫째는 심판의 콜 문제였고 둘째는 룰 개정에 관한 문제였다.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유전과 선배 현민 형이 주심을 본다는 이유로 조경과는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 심판! 저게 왜 스트라이크야. 완전 빠졌잖아. 딱 봐도 볼인데.
- 저걸 스트라이크 안 주면 어디로 던지라고? 여기가 프로야구냐.
양쪽 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불만을 간과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유전과 입장에서 볼 때는 딱히 편파적이라는 느낌이 없었지만 조경과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심은 사전에 유전에서 보기로 결정 난 거라 바꿀 순 없었고 재차 공정하게 보겠다는 약속을 하며 불만을 달랬다. 룰 개정 이야기가 나온 건 막상 경기를 해보니 공식 야구 룰을 따를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제일 문제가 된 건 도루였는데 정상적으로 허용했을 경우 성공률은 거의 100프로에 가까웠다. 간단히 말해 1루에 출루하면 3루까지는 사실상 거저 간다고 보면 된다. 처음엔 도루 전면 금지를 주장했지만 그건 야구 본연의 모습을 해친다고 판단해 2루까지만 허용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이 밖에 폭투나 패스트볼 발생 시 진루 금지, 견제구를 던질 때 공이 먼저 들어오면 태그를 안 해도 아웃, 그라운드 홈런 금지 같은 수비 측에 유리한 조항들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이렇게 즉석에서 룰을 뜯어고친 건 경기가 무한대로 늘어질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2회로 접어들자 수업이 끝난 양쪽 학과 신입생들이 하나 둘 스탠드를 채워나갔다. 락희의 모습은 여전히 안 보였지만 여학생들도 제법 많은 숫자가 구경하러 왔다. 관중들이 들어오자 응원 소리도 들리면서 뭔가 시합다운 시합을 하는 분위기가 났다. 이제 겨우 1회를 마쳤을 뿐이다. 앞서고 있는 유전이나 뒤지고 있는 조경 모두 지금부터 진정한 시작인 셈이었다. 승완이의 역투에 힘입어 유전은 3회까지 리드를 뺏기지 않았다. 수비 측에 유리한 룰 개정을 했음에도 점수는 매 이닝 양쪽이 주고받았다. 그렇다고 난타전이라 부르기엔 뭐한 게 정타가 많이 나오지는 않고 수비 실책을 어느 쪽이 적게 하느냐가 경기의 중요한 성패로 작용했다. 어쨌든 더블 헤릭스는 5점을 앞선 채로 3회를 마쳤다. 하지만 3회 투구를 마치자마자 승완이 갑자기 어깨가 아프다며 교체를 요구했다.
- 뭔 소리야. 얼마나 던졌다고 어깨가 아파.
- 야! 그럼 니가 던져보던가. 팔도 뻐근한 게 더 이상 못할 것 같다.
- 너만큼 던질 애가 우리 팀에 누가 있냐. 좀만 참고 계속 던져라. 응?
우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승완이는 끝내 교체되었다. 승완이가 저러는 건 엄살이 아니었다. 하체에 힘을 싣는 정석적인 투구 방법이 아닌 오로지 팔 힘으로만 무식하게 던진 결과였다. 본인도 이 시합에서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인지했기에 1회부터 전력투구로 팔이 빠져라 던져댄 것이다. 그 덕에 초반 리드를 잡긴 했지만 실제로 3회부터 승완의 제구력은 눈에 띄게 나빠져 볼넷 허용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투수가 교체되었고 두 번째 투수로 외야를 보고 있던 동희가 마운드에 올랐다. 구원 등판한 동희는 4회가 시작되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볼넷과 안타를 연속으로 얻어맞았다. 야금야금 점수 차를 좁혀온 조경에게 끝내 리드를 따라 잡히자 2사 후 투수는 다시 형석으로 교체되었다. 승완의 부상으로 경기가 어렵게 갈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한 이닝에 5점차가 뒤집어 질 줄이야. 활기 넘치던 유전의 분위기는 분노와 허탈감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다시 역전하자! 두 점은 금방이야. 우리도 얼른 점수 뽑자고.
길었던 4회초 수비가 끝나자 성훈을 비롯한 더블 헤릭스 선수들은 함께 파이팅을 외치며 재차 의지를 북돋았다. 바로 그때였다. 과자봉지를 손에 든 세 명의 여학생이 경기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도 이들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락희, 덮밥, 나머지 한 명은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셋은 조경과 스탠드로 이동해 나란히 앉아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짐작컨대 수업이 끝나고 매점에 들렀다 오는 길인 것 같았다. 그래, 결국엔 이렇게 오고 말았구나. 이제부턴 팀 더블 헤릭스가 아닌 나의 야구가 시작될 타임이 찾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