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셋은 보란 듯이 더블 헤릭스 티셔츠를 상의 위에 껴입고 전공수업에 들어갔다. 가벼운 눈총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홍보를 하며 관심을 끌고 싶었다. 첫 모임때 10명이 모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라 한 명의 동기라도 더 꼬드겨야 했다. 결국 몇 명의 추가 입단이 이뤄지면서 이젠 제법 구색을 갖출 만한 인원수가 확보되었다. 첫 훈련 일정은 어렵지 않게 잡혔는데 1학년은 필수 교과 수업이 거의 같아서 마지막 수업이 일찍 끝나는 요일로 결정했다. 걱정했던 장비 문제도 과대의 손을 빌려 전기과 야구팀에서 빌릴 수 있었다. 전통이 있는 팀이라 그런지 장비의 구성과 때깔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포수 장비 일체는 물론이고 1루수 전용 글러브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이 술술 진행되다 보니 이제 모여서 훈련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라고 모두 안심했다. 하지만 막상 훈련일이 닥치자 상황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 끝나고 교양수업 있어서 못 가.
- 내일까지 과제 제출인데 아직 못 썼어. 미안.
- 아침부터 몸이 쑤신 게 몸살기가 있네. 다음에는 꼭 나갈게.
- 서울극장에서 여자 친구랑 영화 보기로 했거든.
- 저번엔 그냥 궁금해서 가본 거지 한다고는 안 했어.
뭔 놈의 구구절절한 사유들이 그리 많은지 하나 둘씩 이탈하면서 종국엔 우리 셋 포함 달랑 6명만 모였다. 단체 티를 받을 때만 해도 오키나와 전지훈련이라도 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이런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 어차피 다 올 거라는 기대는 안했지만 첫 훈련부터 9명을 못 채울 줄이야. 연습 장소도 적잖은 골치였다. 초가을 화창한 날씨 탓인지 대운동장은 이미 수많은 학생들로 바글거렸고 캠퍼스 곳곳을 한 바뀌 돌아도 야구를 할 만한 넓은 공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별수 없이 우리의 텃밭인 단과대 뒤편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첫 훈련을 개시했다.
당초 9명 포지션을 제대로 맞춰 훈련하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물거품이 된 지라 각자의 실력을 테스트할 겸 캐치볼부터 시작했다. 어깨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엉뚱한 곳으로 공이 날아가고 글러브 오므리는 타이밍을 놓쳐 떨어뜨리는 실수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지 라는 낙관에 기대어 특별히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다만 지금껏 가볍고 물렁한 연식구로 야구를 했던 나로서는 공인구의 딱딱한 무게감이 다소 부담으로 다가온 건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캐치볼 연습이 지겨웠는지 다들 누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투타 연습에 들어갔다. 6명 중 투수, 포수, 타자를 세운 다음 나머지 3명은 적당한 위치에서 자리를 잡고 돌아가면서 포지션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난리 브루스가 시작되었다.
1. 투수
다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유명 프로야구 선수 폼은 대충 따라해 보지만 공은 스트라이크를 외면한 채 사방으로 날렸다. 큰 소리로 성훈은,
- 강하게 던지려 하지 말고 무조건 가운데만 보고 던져!
2. 포수
포지션 특성상 아무나 쉽지 않은 자리라 그나마 걔 중 공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애를 세웠는데 공이 약간만 날려도 놓치고 알을 깠다. 보다 못한 성훈은,
- 누구 한 명 뒤에 서 있어라. 공 주우러 다니다 시간 다 보내겠다.
3. 타자
어이없는 공에 헛스윙을 붕붕거리는 건 그렇다 쳐도 타구 자체도 매가리가 없어 멀리 나가지 못했다. 혹 홈런성 타구로 인해 지나가는 사람을 맞추거나 단과대 유리창을 깨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하등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화가 난 성훈은,
- 팔만 휘두르지 말고 하체에 힘을 줘서 돌려야지! 이렇게,이렇게. 이게 안 돼?
4. 수비
수비 집중력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으로 놓치고 빠뜨리고가 반복되었다. 당연히 베이스 커버, 병살 플레이 같은 건 애초에 시도할 마음조차 못할 정도. 낙담한 성훈은,
- 자세 낮추고 사람을 보지 말고 공을 봐야지. 아, 진짜....
나는 진심 우리 과에 이렇게 많은 운동 고자들이 포진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심하기로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놈들 죄다 학교 다닐 때 운동과는 담 쌓고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처 하던 인간들이구나. 이 정도 허접한 수준이면 미즈노 글러브 기증을 안 해도 주전으로 뛸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대략 두 시간여의 환장 대잔치는 막이 내렸고 각자 해가 지기 전 가방과 장비를 주섬주섬 챙겼다. 전기과 사무실에 빌린 장비를 반납하고 돌아가는 내내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어차피 우리는 아마추어고 처음이니 못하는 건 당연하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들은 막연히 기대했던 더블 헤릭스 야구부와의 낙차가 지나치게 컸다. 우리가 진정 선수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성훈과 민재는 피곤해서인지 나처럼 생각이 많아서인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