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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Aug 30. 2024

과제 - 9명을 모아라

만일 성훈이 축구나 농구팀을 만들자고 했으면 헛소리 작작 하고 술이나 마시라며 꼽을 줬겠지만 야구, 야구팀이라니! 야구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던 나와 민재는 술기운이 일시에 날아가며 사뭇 진지해졌다.

- 진짜 만들 거야? 야구팀이면 최소 9명은 넘어야 되고 필요한 장비들도 많을 텐데 가능하겠어?

- 동기 남자애들만 서른 명인데 설마 9명 못 모으겠냐. 아니다, 우리 셋 빼고 나면 6명만 모으면 되겠네. 장비는 일단 사람이 모이면 알아서 되지 않겠냐?

민재는 그까짓 게 뭐 대수라며 나의 우려를 가볍게 반박했다. 흥분한 둘을 앞에 두고 성훈은 그럼 당장 시작하자며 지시를 내렸다.

- 목요일 생화학 수업이 4시니까 첫 모임은 그때 하면 되겠네. 진호는 내일 분자생물학 끝나면 애들 앞에서 야구단 모집 공지를 해. 민재는 대자보 만들어서 과방에 붙이고.

- 넌 뭐할 건데?

- 난 총감독이지. 감독이 직접 뛰는 거 봤냐?

     

셋이 지내다 보면 성훈은 확실히 보스기질이 있었다. 외양에서 풍기는 부르주아적 자태와 농담과 진담의 경계가 모호한 일관적인 어투, 그 속에 각종 잡지식이 결합하니 그의 말에선 거부하기 힘든 묘한 권위가 느껴졌다. 뉴스에서 오늘 날씨는 종일 맑음이라 예보해도 성훈이 비가 올 것 같은데~ 라고 하면 진짜로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 난 3번 타자 유격수 할래!

민재는 당장 3번 타자 유격수라도 된 양 힘주어 말했고 나 역시 실종됐던 자신감이 불타올랐다.

- 음, 4번 치고 싶지만 펀치력이 딸려서 그건 무리고 1번 타자 중견수 해야겠다. 어릴 때 동네에서 야구 많이 해봐서 까짓 거 뭐.

나와 민재 둘 다 척 봐도 체육 시간에 민폐나 끼칠 열악한 하드웨어와 운동 신경의 보유자임에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우리는 강렬한 도파민이 필요했다. 남들 다 즐기는 대학 신입생 시절을 이리도 하품 나게 보내고 있다는 무기력과 자책감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우리 셋은 힘찬 건배와 함께 마지막 잔을 비우고 지하철 막차에 함께 올라탔다.

                

다음날 분자생물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단상 앞에 서서 할 말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했다. 가방을 챙기던 아이들은 평소 잘 보이지도 않던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는지 의아해진 눈으로 주목했다. 나는 다소 긴장된 톤으로 유전공학과의 야구팀을 만들겠다는 취지를 밝힌 후 더듬더듬 첫 모임의 날짜와 시간을 공지했다. 예상대로 밍밍한 분위기 속에 동기들의 표정은 대체로 뭐지? 왜 저래? 였다. 단상을 내려오면서 차라리 성훈이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 형편없는 전달력이었다. 한편 민재는 제작한 대자보를 가져와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누가 LG 팬 아니랄까 봐 스포츠 신문 1면에서 오려낸 LG 노찬엽 사진을 떡하니 가운데에 박아붙였다. 나는 성훈이 저 맥락 없는 노찬엽부터 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정작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 ‘유전공학과 학우는 누구라도 환영합니다’이 문구 지우고 대상을 1학년으로 바꿔.

- 왜? 선배들도 같이하면 좋잖아. 시작할 땐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건데.

- 선배들 오면 우리한테 잔소리하고 간섭할 거 아냐. 자기들이 주전 다 해 먹고 1학년은 후보로 빼버릴 수도 있고. 명색이 우리 셋은 창단 멤버인데 경기에 못 나가는 게 말이 되냐?

- 1학년으로 9명 못 채우면 어떡할 건데?

-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드디어 모임 당일. 성훈이 호언장담했지만 나와 민재는 불안감이 영 가시지 않았다. 평소 대화도 안 하던 동기들에게 말을 걸며 참석을 권유했지만 누가 아웃사이더 아니랄까 봐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 9명을 어찌어찌 채운다 해도 문제였다. 그날 온 사람들이 다 한다는 보장도 없고 하다 보면 중간에 빠지는 사람도 생길 테니 최소한 12명 이상은 확보해야 안전빵이라 할 수 있었다. 문득 친하지도 않은 반 애들한테 생일 파티 초대장을 뿌렸더니 아무도 안 오고 혼자 울면서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목요일 생화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 셋은 약속장소인 전공 강의실로 이동했다. 다행히 동기 두 명이 우리와 함께 이동하며 참석 의사를 밝혔다. 다섯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한 명씩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나,둘,셋,넷,다섯....예상을 깨고 남자 동기는 우리를 포함해 10명, 호기심에 놀러 온 여자 동기 셋까지 포함하면 총 13명이 모인 것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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