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봄, 나는 수원에 있는 S대(서울대 아님) 유전공학과에 입학했다. 직전 해 가을 아버지는 고3인 나를 안방에 불러 앉히더니 물었다.
- 대학 어데 가고 싶노? 커서 뭐 할 건데?
- 모르겠어요. 특별히 가고 싶은데도 없고 그냥 점수 맞춰서 갈랍니다.
- 사내자슥이 그게 무슨 말이고. 니는 장래 희망 같은 것도 없나?
일단 가고 싶은 곳 이전에 갈 수 있는 범위부터 정하는 게 순서였는데 자연계 배치표 최상단에 위치한 서울대 물리학과부터 시작해 스카이 학과들이 모두 지워지고 나서야 펜이 멈추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S대 유전공학과에 지원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 지금은 좀 생소해도 내가 볼 적에 미래에 유망한 학과다. 점수대도 얼추 비슷하고 니가 생물, 화학을 잘하니까 적성에도 맞을 거고.
음, 유전공학.... 확실히 이름에서 기계,전기,건축같은 평범한 과보다 뽀대있어 보이긴 했다. 결국 난 별 고민 없이 지원서를 넣었고 수능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 학력고사의 좁은 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처음부터 줄곧 순탄하지 않았다. 신입생 때라 남들 다 하는 MT, 미팅, 동아리 활동 같은 걸 해봤지만 전부 기대 이하였다. 무엇보다 학과 공부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했다. 가뜩이나 심각한 영어 포비아가 있는 나에게 전공원서 자체는 지옥이었고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실험시간도 고역이었다. 첫 학기 내내 학과에서 겉돌았고 전공수업은 이유 없이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덧붙여 여자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캠퍼스가 인문계 자연계로 분리되어 있는 학교 특성상 어떤 학과도 남초현상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곳의 여학생은 상상했던 모습과의 갭이 컸다. 드라마‘내일은 사랑’에 나왔던 고소영과 김정난 같이 예쁜 여학생은 학기 내내 캠퍼스를 이 잡듯 돌아다녀도 발견하지 못했다. 문득 고3 때 애들을 죽어라 패고 다니던 수학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 이 머리에 똥만 들어찬 한심한 새끼들아. 대학만 가봐라. 이쁜 애들이 줄을 선다. 연애는 그때 실컷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코피 터지도록 공부나 해!
이따위 말을 지껄일 때부터 의심을 해봐야 마땅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믿고 싶었다. 저런 반인반수 같은 인간도 대학에서 여자를 만날 정도면 말할 것도 없겠지. 남중 남고를 거치면서 축적된 여자에 대한 환상과 대뇌의 절반이 정액으로 차 있던 때라 이는 힘든 수험생활을 버티게 만든 중요한 동력이었다.
동기들과 대면대면 하는 와중에 그나마 가깝다고 할 만한 친구가 둘 있었는데 민재와 성훈이였다. 셋 모두 교내 활동이나 학과 공부에 흥미를 끊은 인간들이라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붙어 다녔다. 민재는 왜소한 체격에 외모도 볼품없어 학창 시절 숨어서 공부만 열심히 한 찐따 유형이었다. 본인 피셜로는 서울대는 무리여도 연고대는 갈 수 있었는데 내년에 수능으로 바뀌니 재수의 위험을 피하려고 하향 지원했다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가끔 하곤 했다. 그나마 우리 중 학점이 제일 좋긴 했지만 선동렬 방어율을 조금 상회하는 학점을 받은 나와 성훈 때문이지 평점 3.0 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 사실상 도찐개찐이었다. 재수를 하고 들어와 한살이 많은 성훈은 딱 봐도 귀티 나는 얼굴에 체격도 당당해서 인기가 많을 타입이었다. 집도 부자여서 당시로는 드물게 학생 신분으로 자가용을 끌고 다녔다. 겉으로만 볼 땐 나와 민재같은 아웃사이더 부류와 어울리지 않지만 은근 독특하고 재수 없는 구석이 있어 자발적으로 주류 프레임에 들어가지 않았다.
셋이 친하다고 해도 나는 성향이 비슷한 민재랑 주로 이야기를 했다. 성훈은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 그냥 옆에 데리고 다니기만 해도 존재감이 동반 상승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나와 민재의 대화 중 끼어들어 딴지를 거는 경우가 많았는데 둘은 그때마다 성훈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적 사고관을 비판했다. 우리가 영화 서편제와 임권택 감독에 대한 찬양을 하면 그가 한국 영화는 여전히 방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의 스크린 쿼터제는 문제가 있다며 반박했다. 우리가 서태지 신승훈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팝역사의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열거했고, 내가 너바나를 모른다고 하자 유전공학과를 다니면서 DNA 염기 구조를 모르는 인간처럼 취급했다. 골수 롯데 팬인 나와 골수 LG 팬인 민재가 투닥거릴 때도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그에 비하면 동네 야구 수준이라며 혀를 찼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9월의 어느 날. 평소처럼 학교 근처 주점에서 셋이 소주에 오뎅탕을 먹고 있는데 성훈이 원샷 한 뒤 불쑥 입을 열었다.
- 우리 과는 왜 운동 동아리가 없지? 학회, 풍물패, 편집부 이런 재미없는 것들만 잔뜩 있고.
- 왜? 갑자기 안 하던 동아리 활동이 하고 싶냐? 그럼 중앙동아리 가봐. 여기서 찾지 말고.
민재는 성훈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남아있는 제 잔에 나머지 술을 채웠다.
- 야, 우리 과에 야구팀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 니들 다 야구 좋아하잖아.
야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와 민재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약속이나 한 듯 성훈에게 시선을 모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