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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06. 2024

창단 - Double Helix

13명. 물론 몇몇은 야구 때문이라기보다 이 인간 셋이 무슨 작당질을 하나 엿보러 온 낌새가 역력했지만 일단은 무조건 와준 자체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 근데 니들 팀 이름은 정했냐?

성훈은 기다렸다는 듯 괜찮은 팀명이 생각나면 부담 없이 말해보라며 유도했다. 실은 그 전에 우리끼리 팀명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는데 성훈은 이날 사람들 의견을 듣고 결정하자며 확답을 피했었다. 즉석에서 나온 팀명은 역시나 유전 드래곤즈, 슈퍼 세일링즈, 고분자 브라더스 같이 유치하고 센스없는 것들 천지였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훈은 이런 결과를 다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마침내 자신이 생각했던 팀명을 내놓았다. 더블 헤릭스(Double Helix). DNA 이중나선 구조를 의미하며 이는 유전공학과의 정체성과 완전히 부합하는 단어였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다수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나와 민재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대충 의견을 듣는 척 하다 마지막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총감독인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성훈의 계획된 행동일 거라 짐작했다. 상징적 의미도 그렇지만 기존의 프로야구팀들이 베어스 타이거스 트윈스처럼 끝에 복수를 상징하는 S자가 들어가는데 더블 헤릭스는 S가 아닌 X로 맞추는 것이 절묘했다. 성훈 특유의 거만하고 음흉한 속내는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역시 리더는 다르구나라는 걸 나와 민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팀명이 정해졌으니 다음은 장비 조달로 화제가 넘어갔다. 야구는 축구, 농구, 배구처럼 공과 장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글러브, 배트, 포수 마스크, 모자, 헬멧 등 당장 필요한 기초 장비만 해도 만만찮은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뭐 정 안되면 모자와 헬멧은 그렇다 쳐도 배트 없이 공을 칠 수는 없고 글러브 없이 공을 잡을 수는 없었다.

- 집에 글러브나 배트 가지고 있는 사람 손 들어봐.

참석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야구용품을 탈탈 털어 나온 결과는 고작 알루미늄 배트 1개, 글러브 4개, 헬멧 2개가 전부였다. 물론 실제로는 더 있었겠지만 아마 내놓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사실 저 글러브 4개 중 2개는 내 것이었다. 아버지가 몇 년 전 형과 나에게 선물로 사준 미즈노 글러브였는데 고가인 만큼 품질도 뛰어났다. 둘 중 하나는 형의 글러브지만 어차피 형은 군대에 있어 이를 알 길이 없고 훗날 없어진 걸 발견해도 적당히 둘러치면 될거라 생각했다. 귀중한 글러브 2개를 서슴없이 기증한 건 더블 헤릭스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창단 멤버에다 값비싼 미즈노 글러브 기증자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지면 원하는 포지션과 타순을 배정받는 데 유리할 거라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있었다. 대한민국은 모름지기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가. 민재도 욕심이 났는지 본인은 가진 게 없지만 어디서 배트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라 했다. 하지만 정작 성훈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집이 부자고 운동도 좋아하니 야구용품 몇 개 정도는 있을 만도 한데 진짜로 없는 건지 가져오기 싫어서 그런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결론은 적당히 돌려쓰면서 그래도 모자라는 건 다른 학과에서 빌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팀명과 장비 문제가 넘어가자 이번에는 유니폼 얘기가 나왔다.

-  명색이 야구팀인데 유니폼이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우리 유니폼부터 맞추자.

맞는 말이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유니폼 없이 경기에 나설 수는 없었다. 연습 때야 상관없지만 다른 팀과 시합을 할 때 추리닝이나 평상복을 입고 뛴다면 얼마나 모양 빠지는 일인가. 실력이 좀 구려도 유니폼만 제대로 갖춰 입으면 없던 자신감이 뿜뿜 솟아나지 않을까. 성훈은 뭔가 맘에 안 드는지 잠깐 인상을 쓴 뒤,  

- 니들 유니폼 가격이 얼만지나 알고 그러냐? 상,하의 제대로 맞춰 입으면 십만원도 넘을걸. 그 돈 다 낼 거야? 

역시나 돈 얘기가 나오니 태도가 달라졌다. 가장 적극적인 유니폼 구입 의사를 밝혔던 녀석도 그거 입는다고 야구 잘하는 거 아니지라며 슬쩍 발을 빼버렸다. 결국 타협안으로 유니폼 대신 단체 티셔츠를 맞추기로 했다. 티셔츠에 더블 헤릭스 로고를 프린팅해서 박기만 하면 돈도 절약하고 일상복으로도 활용 가능해 일석이조 아니냐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열흘 뒤, 우리는 상단에 영문 이탤릭체로 DOUBLE HELIX, 하단에 이중나선 그림, 모서리에 DNA 염기 A,T,G,C 가 프린팅된 흰색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옷감을 만져보니 싸구려 재질이라 세탁기를 잘못 돌릴 경우 이중나선이 삼중나선으로 번질 것 같은 찝찝한 예감도 들었지만 당장은 가슴 벅찬 울림을 숨길 수 없었다. S대 유전공학과 역사상 최초의 야구팀 더블 헤릭스의 위대한 한 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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