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포르투 4일차-여행의 목적

귀국길 아침, 내게 강 같은 평화

by 카이저 소제

포르투 4일차 아침.

밤새 잠결에 빗소리를 들은 듯 하다.

날이 밝아도 여전히 내리는 비. 오락가락하다 그칠 비는 아니다.

호텔 조식을 먹고 여행가방을 정리했다.

마트에서 욕심껏 사왔던 그린 와인 한 병은 결국 개시도 못했다.

빼곡하게 짐이 들어찬 가방에 와인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와인은 결국 호텔방에 두고 가기로.

누군가 마셔주면 좋은데 혹 버려도 어쩔 수가 없다.


포르투 공항에서 오후 4시 비행기를 타야한다.

룸에서 쉬다가 체크 아웃하고 공항으로 가면 시간도 널럴하게 얼추 맞다.

가방을 정리하고 지퍼까지 채우고 나니 마음이 차분하고 평화롭다.

간만에 느껴보는 느긋하고 잔잔한 평화로움이다.

근데 이상하다.

일년살이도 아니고 한달살이도 아닌, 고작 일주일 머무는 여행길의 마지막 날은 아쉬움이 앞서야 마땅할 듯 하다만.

마치 숙제를 끝낸 듯한 홀가분한 평화로움이 뜨악하다.


과연 내가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것인지 의심이 살짝 든다.

여행을 다니는 내내, 새로운 것을 접하고 재밌어야 하고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기대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하루 2만보 이상을 걸어다니며 체력을 넘어서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는 안도감도 강같은 평화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최근 코로나에 걸려 꼬박 2주 정도를 끙끙 앓다보니 새삼 드는 생각, 비바람에 시달리며 다닌 여행길에서 몸살 감기 안걸리고 배탈 안나고 무사히 보낸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바로 그 순간, 나른한 평화로움을 깨는 느닷없는 딸의 목소리.

" 아무래도 만테이가리아 나타를 먹어봐야겠어."

"......? !"

포르투갈의 유명하다는 나타 맛집 세 군데 중 한 곳인 '만테이가리아'.

일정대로라면 어제 오후에 들렀어야하지만 동선이 어중간해서 포기했던 곳이다.

그렇게 스리슬쩍 포기하고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내심 다행이다 싶기도 했는데 기어이 귀국날 아침에 빗속을 뚫고 나타를 먹으러 가야 한단다.


눈만 끔벅거리며 뜨악해 하는 내 표정이 꽤 떨떠름해 보였나보다.

혼자서 다녀 온다며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한다.

비오는 낯선 길에 혼자 보내기가 편치 않아 따라 나섰다.


구글 지도상 도보 15분 거리에 있다는 나타 맛집.

호텔 입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걸었다.

늘 오른쪽 방향으로만 다녔던 터라 길이 낯설다. 따라 나서길 잘했다.

앱을 켜서 지도를 보고 걷자니 횡단보도나 갈림길 앞에서는 늘 주춤주춤이다.

비 내리는 낯선 길에서 우왕좌왕 주춤거리니 바짓단이 금방 축축하게 젖어온다.


새딱하게 갈아입은 옷이 젖어드니 한숨이 나온다.

짜증이 밀려오는 찰나, 아침의 평화로움을 떠올리며 긍정회로를 돌렸다.

이왕지사 나온 길이니 기분좋게 걷자.

호텔방 티비보다 당연히 볼 것도 많다.

마음 한 번 바꿔먹으니 걸을만 하다.

우산 아래 바닥만 보고 걷다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니 도시 풍경이 눈에 확 들어온다.

고만고만한 가게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조용하면서도 활기 띤 거리는 관광지가 아닌 삶의 현장이다.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 둘러싸인 작고 아담한 성당이 도로변에 있다.

포르투 대성당보다 더 아름답다.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보다 아기자기한 꽃밭 정원에 둘러싸인 작은 성당이 더 아름답고 아련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짓말처럼 갑자기 눈앞에 확 들어오는 볼량시장.

포르투는 정말 작은 도시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든 조만간 다 만난다.

이방인은 그 실핏줄 같은 길들의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할 뿐.


나타 맛집도 볼량 시장 근처라고 한다.

딸이 나타를 사러 간 사이 나는 시장에서 사람 구경을 했다.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에 시장은 부산하고 활기차다.

곧 나타를 사갖고 오는 딸.

하나씩 나눠 먹자고 두 개를 샀다며 배시시 웃는다.


여행의 목적?

궁극적인 목적은 없다.

일상을 벗어나서 순간 순간 그냥 즐기기.

보는 것이든 먹는 것이든 그 순간이 즐거우면 된다.


근데 귀국길 아침이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워도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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