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기차역이란
요텔 포르투의 조식은 아주 근사했다. 무거운 주스병을 들고 따르느라 손이 바들바들 떨린 것만 빼면.
음식도 다양하고 푸짐했으니, 무엇보다 통째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수북 쌓여있어서 더더욱 좋았다.
조금 옹졸하게 생긴 서양배를 디저트로 먹으려고 담았다가 결국 남겼다. 접시에 남긴 것은 그대로 버려질 듯하여 셔츠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나중에 요긴하게 먹으리라.
맛있게 든든하게 먹고 나니 세상이 돈짝만 해 보인다. 패딩으로 중무장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제법 가볍다.
오늘 우리가 가장 먼저 갈 곳은 '상 벤투 기차역'이다.
포르투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우선순위였던 곳.
포르투갈 여행안내책자, 그리고 여행 블로그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칭찬일색이었던 곳이다.
평일 포르투의 아침은 적당히 활기차고 차분했다. 비가 그친 말간 거리는 쾌적했다.
우리 발소리가 울릴 정도로 조용한 거리를 1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탁 트인 광장을 바라보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나온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더러 보인다. 여기는 어디지?
딸이 폰을 들여다보더니 '포르투 시청'이란다.
시청 건물이 이렇게 고색창연하다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낡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관공서라는 것이 놀랍고도 부럽다.
일 년 전에 갔던 스위스의 어느 도시 시청건물이 생각난다. 몇 세기가 지난 건물을 그대로 시청사로 쓰고 있어서 놀라웠다. 경쟁하듯이 더 크고 화려하게 짓기 바쁜 우리나라 관공서가 새삼 밉살맞다.
살짝 내리막인 시청 앞 광장을 따라 걸어가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 가게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세상에서 가장 조용해 보이는 맥도널드 가게였다. 날개를 반쯤 벌린 독수리 조각상이 출입문 위에 버티고 있는 것 빼고는 그냥저냥 맥도널드다. 잔뜩 골이 난 듯 하지만 무섭지 않은 독수리,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벅빅'처럼 생겼다.
가게 내부가 아름답다는데 단지 구경삼아 남의 영업장을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3일 중 하루는 햄버거가 먹고 싶은 날도 있지 않을까? 그때를 기다리자.
광장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는 낡은 짐보따리가 가득하다. 노숙자인 듯한 젊은 여성이 부스 안에서 뭔가를 꺼내오더니 길모퉁이에 웅크리듯 눕는다. 어느 도시나 명암이 있구나.
맥도널드 가게를 지나 큰길로 나오니 갑자기 거리가 활기를 띤다. 공기의 무게와 냄새가 달라지는 느낌이다.
지하철 역 주위로 카페와 빵집이 즐비하고 노천식당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떠들썩하고 분주하다.
목적지인 상벤투 역까지 도보 2분여를 남겨두고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창문으로 얼굴 하나가 나오더니 '곤니찌와~'라고 손나팔을 한 채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거 인사 아니지?"
"인종차별이지!"
리스본에서 겪은 인종차별로 인해 차별 감지 방어기제가 시도 때도 없이 작동한다. 피부색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한 포르투갈에서 동양인을 굳이 찾아내고 구별하는 그들의 수고도 신기하다.
도로를 건너면 바로 상 벤투 역이 나와야 되는데 어랍쇼, 안 보인다.
바로 앞에 있는 지하철 계단도 혹시나 싶어 내려가봤다가 공연히 기운만 뺐다.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걸어서 1분 거리면 말마따나 코앞이다. 근데 왜 안 보이냐고!!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공사장 가림막 쪽으로 가고 있다.
가림막 뒤에도 길이 있었어? 따라갔다.
공사장 옆에 터놓은 비좁은 길을 지나가니 상 벤투 기차역 입구다. 공사장 가림막이 기차역 건물 외관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상 벤투 기차역.
2만 개의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에 이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까지, 오늘은 눈호강이 제대로구나.
아줄레주 타일 벽화로 포르투갈의 역사를 표현했다 하니 더더욱 기대가 된다.
그리고 드디어 들어간 기차역.
딸과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책에서 본 사진과 내가 직접 보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날까. 왜 사람들이 극찬하는 곳에서 감동은커녕 감탄사 한마디가 안 나올까.
"음..."
"괜찮네..."
이른 아침 이곳을 찾아온 우리의 수고를 무위로 돌릴 수 없다는 생각에 격려하듯이 나눈 짧은 대화.
기차역 안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예술작품을 보는 안목도 없고 포르투갈의 역사도 모르니 보고도 못 보는 당달봉사인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안다고 한들 흐릿하고 반들거리는 타일 그림의 어디에서 그 역사를 읽어낼 것인가.
높은 천장과 밝은 채광, 그리고 푸른 타일장식이 아름답긴 하다.
기차를 타고 상 벤투 역에 내렸거나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에 왔더라면 그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으리라. 근데 발품 팔아 기차역 하나 보겠다고 오면 조금, 혹은 많이 허탈할 수도.
몇 발짝만 걸어 나가니 바로 기차를 타는 플랫폼이다. 기차를 타러 나가는 사람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부러움이 인다.
여행을 와서도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그냥 훌쩍 기차를 타고 포르투 근교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인다.
자고로 기차역이란 기차를 타는 곳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