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포르투 2일차 -렐루 서점

해리 포터는 없지만

by 카이저 소제

아이들이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차츰 '정리'가 된다. 지인들에게 주거나 중고서점에 팔거나.

더는 읽지 않을 듯한 책인데도 버리기 힘든 책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렐루 서점.

해리 포터를 좋아하면 꼭 가볼 만한 서점이라고 했다. 무조건 가보고 싶었다.

상 벤투 기차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 동선 짜기도 좋았다.

기차역을 나오니 눈이 부실 정도로 하늘이 파랗다. 제발 이 날씨가 주구장창 이어지기를.

포르투의 번화한 도심을 천천히 구경하며 걸었다.

20여 분쯤 걸었을까. 널찍한 도로, 하지만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오르막길의 끝무렵, 무리지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구불구불한 긴 줄이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된다.

렐루 서점 입구다.

평일 오전 11시경에, 그것도 여행 비수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릴 줄은 몰랐다.

어느 줄이 우리 줄이냐. 맨 앞쪽으로 걸어갔다.

안내판에 프리미엄, 골드, 실버 등등이 적혀있다.

출국 전에 우리가 구입한 티켓은 1인당 10유로짜리 실버다. 렐루 서점 티켓 중 가장 가격이 싼 실버.

단지 서점에 들어가는 값으로 우리 돈 1만 5천 원을 내야 한다. 그 돈을 내고도 굳이 줄 서서 들어가고 싶은 서점이라...


티켓을 주섬주섬 꺼냈다.

티켓 맨 위에 크게 적혀 있는 글.

'Welcome to The World's Most Beautiful Bookshop!'

포르투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 상 벤투 기차역, 그리고 렐루 서점까지. 하루동안 세상 아름다운 것을 시리즈로 보고 있다.


서점은 작고 아담해 보이는 2층 고딕양식의 건물이다.

밖에서는 작아 보이는데 내부는 어떨지 모른다. 베르트란드 서점도 외관과 달리 안은 제법 널찍했으니.

줄이 너무 길어서, 게다가 가격 싼 실버 티켓이라 한참을 대기할 줄 알았는데 입장 시간은 칼같이 지킨다.

티켓에 찍힌 입장시간이 되니 줄이 열린다.

정문을 지키는 정장 입은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면 큐알코드 찍고 바로바로 입장이 된다.


그리고 내부는...문자 그대로 미어터진다.

단언컨대 포르투갈의 관광지에서 단위 면적당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생면부지 사람들과 몸이 계속 부딪히거나 닿아 있어야 한다.

사진을 찍으면 사람들 머리가 올록볼록 같이 찍힌다.

고개를 휘휘 돌리니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빨간 계단이 보인다.

작고 짧은 나선형 계단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딘가 꼬인 듯 신비로운 모양이, 게다가 새빨간 색이라 독특하고 아름답다.

해리포터 마법학교인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계단과 이미지상 겹치긴 한다.

굳이 렐루 서점에서 해리포터의 흔적을 찾으라면 이 계단을 언급할 것 같다.

포토존인 계단 근처는 사진 찍는 사람들과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붐빈다.

대기 타고 있다가 냉큼 찍고 잽싸게 비켜야 한다.

젊은 여성이 계단에서 포즈를 잡고 있으니 앞에 서있던 나이 지긋한 남성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성이 사진 찍던 남성에게 팔을 내저으며 항의를 한다. 사진 찍지 말라고.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으니 별일이 다 있구나.


주춤대며 구경만 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온갖 화려하고 예쁜 것을 한 곳에 몰아넣으면 이런 느낌일까. 서점은 빈틈없이 화려하다.

넘쳐나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기도 했다.

나무로 된 2층 바닥이 걸을 때마다 울렁이며 삐걱댄다.

혹시 2층 바닥이 무게를 못 이겨 내려앉으면 어쩌나 싶다가도, 이 정도 인파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떨어지면 무사히 착지할 것 같기도 하다.

새도우 복싱 하듯이 움직이기도 피곤하여 한쪽에 서서 책구경을 했다. 기념품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책들이 많다. 1인당 10유로의 입장료는 책을 구입할 때 바우처로 사용할 수 있다.

기념할 만한, 그리고 간단하게 읽을 만한 책을 찾다가 손바닥만 한 '어린 왕자'를 집어 들었다.


한 발 내딛기도 힘든 인파 속에서도 계산대 앞에는 어김없이 질서 정연한 줄이 늘어서 있다.

'혼돈 속에는 조화가 있고 무질서 속에는 질서가 있다'는 칼 융의 말은 사실이었다.

삐걱대며 울렁이는 바닥을 온몸으로 느끼며 차츰 짧아지는 줄에 서있으니 정장 입은 계산대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어디서 오셨죠?"

"스웨덴에서 왔어요."

스웨덴에서 온 여행객에게 스웨덴 말로(아마도) 인사를 한다. 여행객에게 일일이 어디서 왔는지 묻고 그 나라 말로 응대를 하는 직원, 놀랍다.

명이 더 지나가고 내 차례다.

준비하고 있었다.

"Where are you from?"

" I'm from South Korea."

"안~녕~하세요~ !"

"올라 !"

티켓 두 장을 바우처로 한꺼번에 쓸 수 있는지 물었다. 한 명이 한 장만 쓸 수 있다고 한다.

10유로 바우처 외에 추가로 결제된 돈이 5.95유로.

음. 손바닥만 한 어린 왕자 책값이 대략 16유로인 셈이다.

우리 돈 24,000원쯤.

나는 이날 포르투갈의 관광산업뿐만 아니라 출판산업에도 힘을 보탰다.


해리 포터랑 같이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딸은 계단 사진 한 컷을 못내 아쉬워했다. 잠시 조용한 틈을 타 렐루 계단을 배경으로 잽싸게 사진 한 장 겨우 남겼다.

언젠가 조앤 롤링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렐루 서점에서 해리 포터의 영감을 얻었다는 세간의 떠도는 이야기와 달리, 조앤 롤링은 렐루 서점에 와본 적도 없다고 했다.

조앤 롤링이 몇 년간 포르투에 살았던 이력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포르투에서 해리 포터를 집필했다고 하니 더더욱.

어쩌면 과거와 현재가 마구 섞여서 공존하는 포르투에서 조앤 롤링의 작가적 상상력이 스며들듯이 길러진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맥도널드 입구에 있던 독수리 조각상을 보며 곧바로 해리 포터의 벅빅이 떠올랐던 나의 상상력처럼.


마술 상자 같았던 화려하고 작은 렐루 서점.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한 짧고 강렬한, 혹은 동화책 삽화 속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묘한 느낌이 남아있다.

해리 포터는 없지만 렐루는 렐루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