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포르투 2일차-마제스틱 카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by 카이저 소제

렐루 서점을 나오니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불과 1시간 전쯤, 상 벤투 역을 나설 때의 파랗게 공활한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낮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포르투 날씨 변덕도 리스본 못지않다.


마제스틱 카페로 방향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생긴 지 100년을 훌쩍 넘긴 이곳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로 알려져 있다.

사실 '가장 아름다운' 보다는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의 초안을 썼다고 해서 더 유명한 곳이다. 포르투에서 3년 남짓 살았던 조앤 롤링은 포르투갈 관광산업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리스본의 '아 브라질레이라'에 이어 포르투의 '마제스틱'.

미리 콕 집어서 여행 일정에 집어넣은 카페 두 곳.

이 둘의 공통점은 유명 작가들이 아지트 삼아 이용했다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입히면 매력적인 상품이 된다.


번화한 거리에서 마주한 마제스틱 카페는 예상대로 붐볐다. 흰색 유니폼을 제복처럼 차려입은 직원들이 좁은 통로를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자리가 있냐고 물으니 두 명이 앉을 만한 작은 탁자로 안내한다.

100여 년 전 카페가 생긴 이후 오랫동안, 최소한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를 집필할 때까지는 이렇게 문전성시는 아니었을 것이리라. 복닥대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사실 아 브라질레이라와 마제스틱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신 사진 찍는 사람들은 많다.

음료나 디저트만 먹는 우리나라와 달리 포르투갈의 카페는 식사를 겸한다. 샌드위치나 식사용 빵과 칵테일 등 메뉴가 다양했지만 호텔 조식에 이어 점심까지 빵으로 때울 수는 없다. 에스프레소와 핫 초코 한 잔씩을 주문했다.


작아 보이는 입구와 달리 내부는 길쭉하고 널찍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느낌이다.

축축 늘어진 샹들리에가 대낮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카페는 화려하다. 화사한 조명과 짙은 나무색이 조화롭다. 예쁜 게 장땡이라는 '아르누보'양식의 건축물이니 당연히 화려하고 예쁠 수밖에.

근데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없다.

파도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창 앞 빈백에 기댄 채, 놀멍 쉬멍 물멍을 더불어하며 커피 한 잔을 마셨던 동해안 카페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아름다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일단 실내로 들어온 이상 화장실은 들러야 한다.

그랜드 피아노 뒤쪽에 화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역시나 화장실은 지하에.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포르투갈식 건축법이라 거의 확신이 든다.

화장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동양인 여성이 계단을 내려온다. 딱 봐도 일본인처럼 보인다. 특유의 살짝 웃는 상냥한 얼굴.

눈이 마주치니 반색하며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워한다. 나도 그녀가 반가웠다. 동양인이 드문 곳에서 생기는 이른바 소수자의 동지 의식.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국적이 다른 초면의 중년 여자 둘은 포르투갈의 변덕스런 날씨에 대해 불평했다. 남편과 왔다는 그녀의 말에 내가 놀라움을 표했고, 딸과 왔다는 내 말에 그녀가 감탄했다. 좋은 여행 하라는 덕담도 주고받았다.


몇 년 전 읽었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생각난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비정함을 반박하고 싶은 저자의 선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억지스러운 논리 전개에 실망스러웠던 책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다정해야 살아남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결국 '다정함'도 생존의 무기라는 것.

남자보다 여자들의 평균수명이 더 긴 이유 중 하나는 어디서나 누구와도 순식간에 다정다감해질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호로록 마시고 일어나는 순간, 우리가 아직 결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엉거주춤 다시 앉았다.

카페에서의 나중 결제, 참 익숙해지지 않는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니 멀찍이 앉아있던 일본인 여성이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든다.

뭐지? 이 따사로운 뭉클함은.

나도 덩달아 손을 흔들며 입모양으로 '바이바이 '라고 화답했다.

100년 된 카페 마제스틱을 떠올리면 5분 정도 대화를 나눈 일본인 여성이 먼저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포르투갈 여행 중에 딸을 제외하고 사적인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다.

오랫동안 기억되겠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절반쯤의 진실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