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태를 지탱하는 힘에 대하여
작업을 하다 보면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겠는데,
어디가 문제인지 정확히 짚어내기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색도 괜찮고 선도 나쁘지 않은데,
화면 전체가 어딘가 불안정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그럴 때 저는 눈에 보이는 요소들을 고치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는 ‘구조’를 먼저 의심하게 됩니다.
골조는 작업의 가장 안쪽에서 작동하는 힘입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형태를 지탱하고 리듬을 유지하며
작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에서 붙들어주는 뼈대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로 드러난 이미지에만 시선을 두곤 합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결정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 무엇을 반복할 것인지,
어떤 감각은 끝까지 밀고 가고
어떤 감각은 초기에 멈출 것인지.
이런 보이지 않는 선택들이
층층이 쌓여 비로소 하나의 골조를 이룹니다.
골조는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작업을 묵묵히 반복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무엇을 지워도 끝내 남아 있는 것,
형태를 바꿔도 계속해서 작동하는 흐름.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것이 내 작업을
지탱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골조는 치밀한 계획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해 온 선택들,
나도 모르게 자꾸 돌아가게 되는 방식들,
쉽게 버리지 못하는 고유한 감각들.
그 축적이 작업의 내부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골조가 생기면 작업은 역설적으로 한결 자유로워집니다.
뼈대가 튼튼하면 겉모습은 얼마든지 유연하게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질 것 같다는 불안이 줄어들기에,
형태는 변해도 작업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캔버스 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이 조금 흔들리거나 색이 예상과 다르게 나와
화면이 잠시 혼란스러워 보일 때도,
작업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나를 지탱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점입니다.
이 좌표는
“어떻게 더 잘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 작업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형태보다 먼저 자신의 골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골조를 인식하는 순간,
작업은 이전보다 훨씬
멀리 나아갈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좌표 07. 골조
작업을 지탱하는 힘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드러나지만,
실은 가장 먼저 작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