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형태가 되는가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결과물보다 과정의 ‘속도’가
더 또렷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작업이 잘 풀리는 날과 막히는 날의 차이가
실은 재능이나 집중력의 유무가 아니라,
작업이 가진 ‘리듬’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리듬은 작업이 흘러가는 고유한 방식입니다.
얼마나 자주 멈추는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는지,
한 번의 몰입이 얼마나 이어지는지.
이 모든 시간의 패턴이 모여 작업만의 박자를 만듭니다.
우리는 종종 집중이 끊기는 순간을 실패처럼 느낍니다.
흐름이 깨졌다고 자책하며 억지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하지만 작업을 오래 지속하며 저는 오히려
‘끊김 자체가 리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매끄러운 선이라기보다,
중단과 재개의 집요한 반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멈췄다가 다시 붙고,
조금 나아가다 또 멈추는 그 과정 속에서
작업은 비로소 고유한 박자를 갖게 됩니다.
이 박자는 외부에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만 스스로 형성됩니다.
리듬은 무작정 속도를 올린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자리로 얼마나 자주 돌아오는지,
같은 질문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는지에서 생겨납니다.
매번 새로운 결과를 내려고 서두르기보다,
비슷한 조건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반응을 관찰하는 시간.
그 축적이 작업의 리듬을 서서히 드러냅니다.
캔버스 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에 완성하려는 화면은 대개 숨이 가빠 보입니다.
반면 겹쳐 그리고 지우고, 다시 돌아와 덧입히는 과정을 거친 화면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흔적을 품게 됩니다.
리듬이 생긴 화면은 보는 사람에게도 안정적인 호흡과 깊이를 전달합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리듬’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리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짧게 폭발적으로 몰입하고,
누군가는 자주 멈추며
천천히 걸어갑니다.
어떤 리듬이 옳은지는
외부의 기준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 리듬을 타고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 리듬입니다.
이 좌표는
“얼마나 빨리 갈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속도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작업은 어느새 자기만의 박자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이 쌓일수록,
작업은 점점 중단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좌표 08. 리듬
리듬은 멈추지 않는 속도가 아니라,
길을 잃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간격’에서 만들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