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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

걷는다는 것의 미학

by 현정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읽히는 글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이미 알고 있는 이 시대를 관통했던 작가 박완서의 글에는 일상 안에 사로잡힌 시대의 무거움과 버팀, 초라하지만 행복하기도 했던 시절의 그리움이 들어 있다. 글에는 초췌한 표정이 없다. 가슴으로 쓸어내리게 하는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눈여겨보아 갈 작가의 이야기에 보통의 우리가 모두 들어 있고 그 힘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글 안에 진정성은 누구나가 겪어낸 시절이기에, 그 안에 사랑과 용기와 진솔함이 모두 있기에 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마음이 요동쳐 내내 닿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나무와 풀들, 새들과 다람쥐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은 꽃나무들이 온전하고 온갖 새들이 거침없이 지저귄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p.3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산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이런 복을 어찌 누릴까. p.3


가벼운 산책이라 하더라도 산책으로 인해 내 안의 나를 만나가는 사실에 마음이 머문다. 우리 동네에도 야트막한 봉이 있다. 요새 제대로 오르지 못했지만, 이전에 마음먹고 오를라치면 숨이 턱턱 차오르고 다리도 아픈 것이 영 쉽지 않다.


결코 우습게 보아갈 만만한 산이 아니다. 만만함 뒤에는 당연함이 있고 그래서 소중하게 안아갈 마음을 살짝 비껴갈 수 있다. 만만함을 걷어 내고 나의 호흡을 느끼는 순간 산은 자신을 제대로 내 보인다. 나와의 호흡뒤에 들리는 새의 노래와 물결치는 바람의 잎새들, 우거진 녹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햇빛에 반짝거리는 순간들.


땅과 내가 닿은 자리가 가뿐해질 순간은 올라선 순간에 펼쳐진 풍광에 땀을 식힐 때이다. 물 한 모금 달래 온몸을 적신 순간 들어오는 풍경은 날마다 같지만 다르게 다가온다. 솔잎의 바스락이 좋고 참나무 둥치마다의 잉여로움이 빛나는 순간, 나는 얼마 나의 감사를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나?


그 산책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p.5


산길

고요의 길


적막함 안에 드리워진 온갖 소리에 귀 기울이던 순간


인생

마음의 길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여유롭게 보아갈 시선으로의 길을 나는 만들고 있나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p.5


가슴으로 품은 감사를 나는 얼마나 다스리고 있나.


내가 하는 일을 두 다리가 버티어 주어 고맙다.

내가 가는 길마다 두 다리가 이어가 주어 고맙다.

내가 생각한 대로 두 다리가 실행해 주어 고맙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두 다리가 묵묵하게 함께 동행해 주어 고맙다.

잘못 간 길이라 하더라도 다시 걸어내는 두 다리가 있어 고맙다.

누군가가 먼저 내어 준 그 길이 있어 고맙다.

누군가가 개척하고 밝혀 준 길 덕분으로 나아갈 수 있어 고맙다.

누군가가 다듬어낸 길 덕분에 온전히 걸을 수 있어 고맙다

누군가가 흘린 땀으로 안전하게 마주할 오늘의 길이 있어 고맙다.


나는 내 다리에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전했었을까?

나는 타인이 낸 길을 따라가면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었을까?


다시 길을 떠올리다.


모든 길을 허투루, 대수롭게,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테다.

앞으로의 길이 나와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렵지는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혼자 걷더라도, 혼자이기에 절대 외롭지 않은 길 따라 길, 우리네 길이다.



화면 캡처 2025-09-07 203521.png 인생의 걸음이 모두 청춘이기에 지금이 가장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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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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