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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May 03. 2019

003 사이와 사이에서

La Sagra Suxinsu, Triple Rubia Ale

  

  오늘은 맥주이기도 하고 화이트 와인 같기도 한, 경계가 애매한 맛을 지닌 스페인산 맥주,  라 사그라 수친수 La Sagra Suxinsu, Triple Rubia Ale을 소개해 드릴게요.


  부드럽고 깔끔한 ‘라거’ 스타일의 맥주 맛을 좋아하시는 손님들도 있지만, 배만 부르고 ‘취하지 않는’(?) 손님들은 ‘에일’ 맥주를 좋아하시겠죠? 저온 숙성 스타일의 ‘라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익숙한 ‘아빠들의’ 맥주 맛이지만, 이것보다 좀 더 높은 온도에서 숙성시키는 ‘에일’은 비교적 최근에 소개된 맥주이자, 도수 높고 개성 강한 의 크래프트 비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La Sagra Suxinsu, Triple Rubia Ale 역시, 향이 강하고 부드러운 맛을 지녀, 와인 대신 그 자리를 채우기에 충분하고,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인기가 있을 녀석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맛에 비해서는  큰 병 기준으로 4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 약간 비싼 듯 보이고 수입되는 물량이 많지 않아서 만나기도 쉽지 않아요.


  로고가 묘하게 생겨서 알아봤더니,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소재로, 저무는 석양과 풍차, 그리고 세숫대야를 상징한다고 하니 이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의 ‘멘탈’을 조금 짐작케 하는군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고, 약간은 맛이 간 듯 도전하는 ‘라만챠의 기사’ 같은 사람들이 ‘찰리의 초콜릿 공장’ 같은 양조장에서 반쯤 취해 색다른 맥주 맛에 도전하고 있을 것 같은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이 정신 나간 스페인의 맥주 제조자들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이 병에 다 담아보려 한 것 같아요. 무슨 맥주가 꽃향기도 나고, 살구와 복숭아 같은 과일 맛도 나면서 그 이름처럼  rubio(금발)의 빛을 담아, 9도가 넘는 알싸한 에일의 단단함까지 보여주다니요!



  



 


  이 맥주를 드시던 손님은, 대학시절 뜻하지 않게 친구의 애인에게 고백을 받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답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돌아오던 새벽녘, 편의점에 들러 혼자 맥주 한 캔을 넘기던 날.


  ‘왜.. 만나지 않았어요? 맘에 안 들었어요?’

  ‘아뇨.. 진짜 예뻤는데... 하하..’

  ‘그런데요? 친구의 여자라서?’

  ‘남친의 친구로서, 그녀와 나와 굳어진 관계에 어떤 선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넘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 그런 거죠’

  ‘에이, 설마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어떤 ‘사이’에서 다른 어떤 ‘사이’로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계의 변화는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니까요.


  생각하기 나름이었겠죠.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이’에서 또 다른 ‘사이’로 변해가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요.



  

  

  모두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경계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경계선이 단계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단 하나의  단단한 벽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다가서도 여러 해를 만나도 끝까지 깊은 속을 잘 모르겠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남들에게는 철벽녀 소리를 듣지만 알고 보면 마음이 아주 약해서 한번 무너지면 다 퍼주는 친구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경계선에서 서 있을 때 내 자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서로를 마주하면서 가장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가장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가장 후회하기도 하는 바로 그 '사이'의 경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마음의 밑천을 드러냅니다.


  지독하게 얄미운(?) 놈은 나를 그런 경계에 몰고 간, 바로 그 사람입니다. 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친구로서도 정말 좋은데, 심지어, 사귀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하다니요. 미워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계속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기는 더욱 힘들게 하는, 정말 원망스럽던 그 사람.










  돌아서지 마세요.


  분명, 후회할 것이에요.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경계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흑인과 백인이 같은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도 겨우 몇십 년 전부터였고요.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도,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어느 사랑에도 사실은 ‘선’이란 게 없어요.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자끼리도 남자끼리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인데요) 하지만, 애써 서로를 구분 지으며 사실은 나의 마음이 다치기 싫어서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면서, 정말 소중한 인연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의 경계에 불과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사이’와 ‘사이’를 잘 지켜서,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하였나요?


  맥주면 어떻고, 와인이면 어떻고,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La Sagra Suxinsu 같은 맛이면 어떤가요. 저는 이상하게 그렇게 복잡한 맛에, 사람으로 치면 '친구'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하고 '어른' 같다가도 '아기' 같은, 꽤 이상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끌리던데요.



  경계가 없으니,

  어디서부터가 사랑인지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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