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성당오빠 교회언니 결혼

마흔, 종교갈등 해결방법

by 아테냥이

(해당글은 특정종교에 대한 비판적 의도가 없으며 개인적 경험과 의견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썸만 탈 거예요?"


그 한 마디가 자동차 안의 따스한 공기를 단번에 얼렸다.


그는 신중하게 만나되 손절은 칼같이 빠르다는 ISTJ 남자였다. 하지만 삼십 대 후반, 몇 달간의 썸은 신중을 넘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퇴근 후 지옥 같은 고속도로를 뚫고 오면서도 정작 고백은 하지 않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래요, 고민되는 부분 있어요?"

"사실은..."


그 한마디가 우리를 부산 온천천 카페거리의 한 카페 2층 창가로 데려갔다.




창밖으로는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물결처럼 흐르고, 우리는 서로의 공통점 찾기라는 썸초기의 달콤한 대화에 빠져 있었다.


"해외여행 좋아하세요?"

최근 해외출장을 다녀온 그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기억 속에 있는 몽골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몽골 밤하늘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별이 쏟아질 듯 많아서 야외 침낭 속에 들어가 별 보며 잤었어요."


그가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가족여행으로 갔어요?"

"아니요, 선교로 갔어요."


해외에서 선교하고 봉사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앞에 앉은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천주교인데, 지금은 성당 안 다니고 있어요."


그의 말이 나는 그저 '탈종교'의 의미로, 무교가 됐다는 설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날,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당신이 굉장히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관계가 깊어질수록 알게 되었다. 그는 영혼의 뿌리까지 모태성당오빠였다.






그리고 3년 후,

사촌언니 집에 들어서자 막 태어난 둘째가 100일도 채 안 된 몸으로 작은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집 안 가득 아기 냄새와 젖 냄새가 퍼져 있었고 우리는 안방 침대에 나란히 앉아 소곤소곤 근황을 나눴다.


나는 조심스레 청첩장을 건넸다.

“언니, 나 결혼해. 축하해 줄 거지?”


어떤 사람이냐, 성품은 어떠냐, 뭐 하는 사람이냐 언니의 물음은 예상 가능한 순서로 이어졌다.

나는 웃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피할 수 없는 화두가 튀어나왔다.

그 주제는 '종교'였다.


"누군가는 옳은 얘기를 해야 하잖아!"


언니의 목소리가 결국 높아졌다.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공기를 갈라 방 안에, 그리고 내 마음 깊숙이 꽂혔다.


나는 한숨처럼 대꾸했다.

"언니... 나 청첩장 주러 온거야.
축복받으러 온 거라고.
종교가 그것보다 더 중요해?"


사랑과 결혼이라는 따뜻한 단어 위에 종교라는 단단한 그림자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새 생명을 축복하고 결혼을 축복받으러 왔을 뿐인데, 돌아온 건 경고처럼 날카로운 말뿐이었다.


하나님의 사랑, 희생, 심판, 후회... 어쩌면 저주 같은 말도 들었다. 언니는 아기를 이유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고 나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을 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나는, 사촌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꼭 교회 다니는 사람과 결혼해야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흔이 되면서 생각은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달라졌다.


교회 권사님들이 늘 말씀하셨다.

"신앙을 보지 말고 성품을 봐야 해."


그때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신앙심이 곧 사람의 됨됨이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믿었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굵게 선을 그어두고 그 외에는 배척했다. 아니, 배척인 줄도 몰랐다.


문득, 굵게 그은 선 밖에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과 가족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고 이웃을 보듬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마흔의 나는 이 오랜 경계선을 스스로 지웠다.






그가 3년 전 고백을 망설였던 이유는 내가 매주 교회에 가자고 강요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당시 코로나 시국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앙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였기에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해 자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성당은 토요일에 가요?"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모신다던데요?”

“교황을 신으로 받드는 건가요?”


선입견의 장막에 가려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순간 그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지만, 웃으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고 하나씩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도 내게 물었고 나도 아는 만큼은 대답했다. 그렇게 서로의 우주를 흥미롭게 배워갔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걱정할 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혼식은 교회예식으로 하나, 성당식으로 하나'

'힘들 때 함께 어디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할까.'

'가족 중 누가 돌아가시면 어떤 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하지?'

등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부딪힐 현실적인 벽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3년간 서로를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나니, 본질은 같았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이 같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아끼는 마음도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의 성품은 변함없이 따스했고, 함께 있으면 마음 깊이 행복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랑이 주는 축복이자 배우자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마흔의 결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예식방식이나 어떤 것도 고집하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 결혼식까지 예비 시부모님도 성당에 대한 강요가 없으셨다.


딱 한 번, 어머님께서 물으셨다.

"너희 혼배성사 안 받는 거야?"

예비신랑이 짧게 대답했다.

"네."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설득도, 회유도 없었다.


남은 것은 단순했다.


그저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

이렇게 살아가기에도 삶은 너무 짧다. 벌써 마흔이 되어 버렸으니까.


같은 종교를 가진 가족에게서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 다른 종교를 가진 가족에게서 환대받았다.


신앙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믿음이 아니라 사랑, 교리가 아니라 삶.


마흔의 나이에 나는 비로소 알았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결국 결혼이라는 새로운 여정 앞에서 우리를 붙잡아준 건 ‘사랑’이었다.





에필로그


결혼식 날, 나는 신부대기실에서 긴장 반 기대 반으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사촌언니가 형부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백일도 안 됐던 둘째까지 형부의 품에 안겨 함께했다.

언니는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기다렸다.

언니가 슬며시 나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축하해! 잘 살 거야. 너무 축복해, 사랑한다"

"언니, 고마워.."


우리는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았다. 눈가가 시큰하게 붉어지고, 말 대신 마음이 전해졌다.

그것은 언니의 진심 어린 축복이었다.


그 순간, 종교의 차이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랑과 진심으로 맺어진 결혼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