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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멈추게 한 건강검진 결과지 (상)

마흔, 처음 만나는 낯선 병명들

by 아테냥이





이석증 같은데, 정확한 검사는
내일 병원에 다시 와서 해보세요.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석증? 처음 들어보는 낯선 병명은 귀에 걸려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석증이요? 그게 뭐죠 선생님?"


평소라면 아무리 아파도 응급실 문턱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이레놀 한 알 먹고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동네병원에서 바로 전문의를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한 달 만에 재발한 급성방광염은 소염제 없이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그 위에 덮치듯 몰려온 끔찍한 어지럼증.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이 끔찍한 어지럼증은, 마치 몸이 땅속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메스꺼운 공포가 밀려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자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이미 지친 몸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거웠고 내 머리 위에 천장이 굴러가고 벽이 기울었다.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어도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끝없이 어지럽게 돌았다.


" 어~ 어~~~ "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신음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처음 겪는 두려움이었다. 그나마 누워서 그 어지럼증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난도 놀이기구 같은 그 악마의 장난은 머리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다시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수십 초가 수 분처럼 길게 느껴지고 시간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나를 가두었다.


'뇌에 문제가 생긴 걸까?'

가슴속에서 공포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며, 나는 그 질문을 붙잡은 채 응급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수액을 맞으며 갇혀 있었다.






마흔쯤 되니, 감기 외엔 걱정 없던 몸에 낯선 신호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혼을 준비하던 그 시기에 처음 들어본 병명, 이석증이 나를 찾아왔다.


이비인후과 정밀검사 결과, “약은 따로 없고, 한 달쯤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겁니다”라는 진단이 돌아왔다.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곳이었는데 함께 간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이석증은 저 같은 아줌마들 나이에 걸리는거 아닙니까?"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을 보았다.

"우리 딸도 이제 나이가 좀 됐죠?~"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어지럼증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흔이라는 숫자가 단순한 나이가 아니라 몸의 지각변동이 시작되는 경계선이라는 걸.


그 계기로 결혼 전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늘 깨끗하다고 말해주던 자궁도 지난해엔 여러 개의 근종을 제거해야 했는데 자궁경부암검사와 초음파를 했다.


눈은 안과에서 시신경과 안압까지 정밀 검사를 받았고,

치과 검진비용으로 돈이 많이 깨졌고,

국가검진 외에도 종합검진으로 많은 추가 비용 들여 정밀하게 피검사까지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오히려 검진 업체 쪽에서 “그런 검사까지는 필요 없으세요”라며 나를 말렸다.




과민성 대장 증상이 계속되자 의사의 권유로 위내시경과 함께 대장내시경도 했다.

그런데 밤새 물약으로 비운 노력이 실패해서 2차 대장내시경까지 받아야 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들은 말이 "대장이 깨끗하게 비워지지 않아 다시 해야 합니다"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또 속이 울렁거리는 맛의 물약을 꾸역꾸역 먹고, 화장실에 가서 변기사진을 간호사선생님께 보여주기까지 하는 수치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 다행히 2차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검진 결과는 언제나 새 숙제였다.

검사할 때마다 치료해야 할 것들이 숙제처럼 늘어났다.


그중, '간결절'은 추적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간결절? 또 하나의 낯선 병명이 내 의료기록에 추가되었다.

마치 몸속에서 벌어지는 숨바꼭질 같았다.

마흔의 검진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앞으로 감당해야 할 두려움의 목록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결혼을 멈추게 만든
그 치명적인 건강검진 결과지는
따로 있었다.


2년에 한 번 국가에서 무료로 해주는 기본검진과 회사에서 요구하는 의무검진에는 없는 검사가 있었다.

바로, 여동생이 이번에 친구와 함께 받았다는 유방, 갑상선 검사였다.


아직 국가 무료 검진 대상 나이가 되지 않았던 터라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은 회사 점심시간을 쪼개 가볍게 검사를 마치고 왔다며 별일 아니라는 듯 해보라고 권했다.


'결혼 전 건강검진으로 이것도 해봐야겠다' 싶어 엄마가 평소 다니는 유명한 유방, 갑상선 전문병원에 모바일 예약 버튼을 누르며 그저 ‘확인 차원’ 일뿐이라 믿었다.


동생처럼 금세 끝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검진실의 문을 여는 그 순간이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될 줄은.

결혼을 앞두고 부풀었던 마음이 한순간 차갑게 얼어붙을 줄은.

그때의 나는 꿈에도 몰랐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했다. 유방과 갑상선 모두 정밀검진으로 결제했다.

갑상선은 피를 뽑아야 하고, 유방은 엑스레이와 초음파까지 진행한다고 했다.


피검사실에 가서 피부터 뽑고, 납작하게 눌러대는 고통스러운 유방 엑스레이를 견디고, 마지막으로 초음파 검사실에 누웠다. 검사가 길어질수록 ‘뭘 저렇게 오래 보시나’ 싶었지만 화면 속 흐릿한 그림은 내겐 암호문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누워 있는 것 뿐.


드디어 모든 검사가 끝나고 마지막은 원장실 앞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 끝이다. 마치고 나가서 맛있는거 먹어야지.’

머릿속은 이미 병원 밖을 달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간호사를 따라 들어간 원장실. 피곤한 기색의 원장님이 의자에 반쯤 기대앉아 모니터를 가리켰다.


나는 당연히 이렇게 말해주길 기다렸다.

“다행히 깨끗합니다.”

그런데,


“갑상선에도 여러 개의 혹이 있고,
유방에도 혹이 많아요.
그런데 유방 쪽에 모양이 좀 이상한 혹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로
총생검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

머리가 하얘졌다.


검진 끝, 인사 한마디 남기고 병원을 나설 줄 알았던 나는 순식간에 낯선 세계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옆 치료실로 이동했다. 상의를 벗고 작은 침대에 눕자 곧 원장님이 오셨고 기계음과 함께 ‘탁, 탁’ 총알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모양이 좋지 않은 혹에 바늘을 쏘아 조직을 떼어내는 총생검. 통증은 크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원장실에 앉았을 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직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원장선생님은 마치 준비된 대본을 읽듯 짧게 대답했다.

“암이라면 그에 맞는 치료를 해야겠지요?”

통신사 고객센터 자동답변 같이 상투적인 말투로 건네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냥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듯, 숨이 막혔다.

결혼을 준비하며 들떠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신혼집을 꾸미고, 앞으로의 행복한 날들을 그려보던 모든 계획들이 한 장의 검사 결과지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지옥처럼 길었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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