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결국 수술대에 오르다
(이전 편과 이어짐)
마흔에 이제야 결혼 좀 하겠다는데,
왜 나만...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워.
다들 쉽게 쉽게 하는데 나는 왜..
병원을 나서자마자,
마중 나온 엄마와 동생이 있는 차에 말없이 올랐다.
병원 진료실에서 들은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근처 저수지 방향으로 몰았다. 차창 밖 병원이 저 멀리 사라지자 흩어진 정신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저녁은 뭐 먹을까? 저수지 근처에 맛있는 팥빵집이 있다던데, 알아?"
엄마와 동생이 일상적인 대화로 나를 다독이려 했지만, 그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댐이 터진 듯 쏟아져 내렸다.
"유방암이면.. 어떡해.. 결혼준비 하고 있었는데..."
차 안에는 내 울음소리만 흘렀고 고요했다. 평소 어떤 것에도 별 요동 없이 쿨했던 엄마와 동생도 무슨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저수지에 도착해 우리는 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다리 정중앙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초록빛 물결과 그 너머로 펼쳐진 산자락이 웅장하지만 고요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 우리 세 사람뿐인 것처럼 적막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쉽게 쉽게도 하는 결혼, 나도 이제 하겠다는데.. 왜 나한테만 이래..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
그 울음은 바람에 실려 물 위에 부서지고 다시 메아리로 돌아와 내 가슴을 더 깊이 때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들이 내게만은 왜 이리도 어려운 건지,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누군가가 갑자기 뒷덜미를 움켜잡고 "넌 안돼! 어딜!" 하며 나를 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때, 예비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연락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병원에서 뭐라고 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검진결과를 털어놓았다.
그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주고라도 반드시 낫게 해 줄게, 걱정하지 마."
말이라도 정말 고마웠지만, 그 당시에 내 머리는 이미 전기가 끊긴 듯 정지되어 하얗게 비어있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한여름에 고장 난 에어컨이 나를 맞아주었다.
결혼은 그렇게 조용하게 멈춰 섰다.
마치 달리던 기차가 갑작스럽게 선로 위에서 멈춰 서듯이 모든 새로운 계약, 그리고 설렘을 담아 구매하려던 새 물건들은 미지의 시간 속으로 보류되었다.
결혼식까지 딱 100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며 웨딩드레스 핏을 위해 몸매를 가꾸고, 피부관리숍을 다니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손 닿을 수 없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저 홀로,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저 누워있을 뿐인데도 온몸에 피가 돌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손끝과 발끝이 계속 시큰하게 저려왔다. 혈관이 얼어버린 것처럼.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일주일은 달력의 한 줄이었지만 그 시간은 내게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막혀버린 모래시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휴대폰에 매달려 인터넷 후기들을 끝없이 뒤졌다.
'혹시 섬유종양성 혹이 아니라 암이라면 어떻게 될까?'
'수술하면 아플까?'
그러나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마음속 불안만 더 짙게 쌓여 갔다.
드디어 결과를 듣는 날이 되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 앞 동그란 의자에 떨리는 맘으로 앉았다.
“총생검 결과, 다행히 암은 아닙니다.”
그 한마디에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듯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안도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모양이 영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빠질 가능성이 커 보여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일부만 검사한 거라, 전체를 떼어내 확인해 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귀에는 무거운 납덩이가 올라간 것처럼 계속 울렸다.
말끝에 덧붙인,
“물론 최종 결정은 환자분의 선택입니다”라는 말은 형식적인 배려일 뿐, 사실상 거부할 수 없는 통보처럼 들렸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검사결과 암이라면 그래도 초기유방암이라 완치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지역에서 손꼽히는 유방 전문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했다. 가장 빠른 맘모톰 수술 날짜는 웨딩촬영 이틀 후였다. 운명의 아이러니가 이런 건가 싶었다.
상담실로 이동해서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예약금을 내고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펜 끝이 종이를 긋는 동안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내 이름이 낯설게 흔들렸다.
견디다 보면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 혹이 자란다
웨딩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엄마의 외출로 더욱 조용했다. 1박2일 입원 준비물을 챙기며 병원에서 건네준 안내지를 펼쳤다. 신분증, 수건, 세면도구, 충전기...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하나하나 체크하며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내 몸속, 정체불명의 것과 마주하러 가는 여정이다.
수술당일, 택시 창밖으로 비가 주르륵 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내가 흘리지 못한 눈물 같았다. 병실에 보호자는 출입불가여서 혼자 가야 했다.
병원 후기를 보고 쾌적하다는 3인실에 배정받고 싶어 일찍 도착해서 배정받았으나, 뒤늦게 오신 아주머니가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간호사의 설명에도 막무가내셨다. 양보해 드리고 비싼 2인실로 들어가는 순간,
'이런 사소한 것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하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호텔만큼 넓지만 공허한 병실에 누워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인터폰으로 수술 순서를 안내해 준다고 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을 펼쳤다.
'내가 그간 보낸 시간들도 허송세월이었을까?'
책장을 넘기면서도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이 내 몸속에 이런 혹을 만들었을까?
어느 날, 숨 막히는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말했다. "참~ 대단해, 나라면 욕하고 싸웠을 텐데..."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내 고통을 확인하는 또 다른 증언 같았다. 그것들이 내 몸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내려오세요. 순서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수술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와 같은 수술을 기다리고 계셨다. 엘리베이터 앞 긴 의자에 차례대로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바로 옆 분이 이 수술을 세 차례나 해보신 베테랑 분이라 경험담을 들었다.
"수술도 아프지만 수술 이후가 더 아파요." 그 말에 마음 한편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15분의 수술 시간 동안 나는 수술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아픔이 없었다. 섬유선종이라는 이름의 혹 하나를 떼어냈고 수술을 마쳤는데도 후련하지 않았다.
다시 병실로 올라와 엎드려 엉덩이 주사와 링거를 여러개 맞았다. 가슴은 압박 붕대에 꽉 묶여 숨을 쉴 때마다 답답했다.
그날 밤, 천둥과 번개가 유난히 거세게 몰아쳤다. 마치 나 대신 하늘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다.
깊은 잠은 오지 않았고 병실의 공허와 폭우 소리가 밤새 뒤엉켜 머릿속을 떠돌았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아침을 맞아 수술 부위 상태를 확인받고 퇴원했다. 일주일 후 실밥을 풀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린 맘모톰 결과는 다행히 좋게 나왔다. 3개월 후, 6개월 후 검진을 받으라고 했고 재발위험은 있으나 결혼 후 아직은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다.
20대나 30대였다면 혹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게 떼어내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흔이 되니 몸속 어딘가에 여전히 혹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수술한 곳은 추적 관찰하고, 다른 혹들이 더 자랐는지 살펴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나이, 그것이 바로 마흔인 것이다.
조직검사를 기다리며 나는 죽음과 삶을 가늠해 보았다.
완벽하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내 삶은 여전히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마흔의 첫 경험은 결국, 삶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