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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기꺼이 짐짝이 되었다

몰디브의 첫인상, 천국으로 체크인

by 아테냥이

매서운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던 초겨울, 우리는 추위에서 도망치듯 비행기에 올랐다. 몇 시간 뒤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계절의 축이 뒤집힌 곳이었다. 몰디브의 12월은 건기의 시작이라 습기는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온도는 따뜻하다 못해 정수리가 뜨거웠다.


수하물 벨트가 뱉어낸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신혼여행으로 예약한 리조트 데스크를 찾아 공항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리조트 부스들 사이에서 우리 리조트의 로고를 발견하고 안도하며 다가갔는데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가?' 불안이 목덜미를 스쳤고 급한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여행사에 연락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났다.

"Mr. Kim?"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예약명단을 확인한 그는 앞장서서 우리를 스피드보트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말레공항 건물에서 짧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 바다이고 선착장이었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태양은 마치 "여기가 진짜 몰디브야!" 하는 듯 강렬했다. 하지만 그 뜨거움이 짜증으로 번질 것 같던 순간,

나는 오히려 그 눈부심 속에서 숨을 들이켰다.


'이게.. 보정 없는 원본 색상이라고?' 생각하며 입으로는 "와아... " 가 기침처럼 튀어나왔다.


몰디브 공항 앞바다의 색이 말로만 들던 뽕따 아이스크림을 수천 개 녹여 부어놓은 듯한, 그런데 형광펜까지 물에 푼 듯한 비현실적인 옥색이었다.

그 쨍한 색감은 영상이나 사진으로 봐 온 것과는 비교되지 않았고 내가 가져간 카메라에도 담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뜨거운 더위마저 상쾌한 필터로 보이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공항 앞바다가 이 정도면 우리가 갈 섬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싶어 더욱 설렘이 커졌다.



스피드보트에서 내려서 리조트로 들어가는 길


스피드보트에 차례로 승선했다. 우리 포함 모두 커플이나 부부로 보였다. 리조트 직원들이 우리 손의 짐들을 모두 맡아주었다.


"Water?"

스피드보트 탑승 후 승무원이 건넨 시원한 생수 한 모금을 들이켜고 보트가 하얀 물살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때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는 몰디브에 신혼여행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몰디브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완벽한 수동성'이 주는 평화가 있는 곳이었다.

낯선 땅에서 지도앱을 켜고, 익숙지 않은 렌터카 핸들을 잡고 길을 잘못 들었다며 남편과 실랑이를 벌일 일도 없는 나라다.


해외운전면허증과 내비게이션도 당연히 필요 없었고 심지어 공항과 리조트에 와이파이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해외 유심조차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리조트 직원이 이끄는 대로 짐을 맡기고 안내해 주는 보트에 엉덩이만 붙이면 되었다.


마흔에 결혼한 우리는 기꺼이 '짐짝'이 되기로 했다.




섬으로 입장


우리가 주도적으로 길을 찾지 않고 핸들을 꺾지 않아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여행. 치열하게 살아온 마흔의 우리에게 신혼여행에서 필요한 건 '모험'이 아니라 '휴식'이었다. 일과 결혼준비로 수많은 결정을 내리느라 지친 뇌를 잠시 꺼두고 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만큼 달콤한 사치가 또 있을까.


보트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40분가량을 쉬지 않고 달렸다. 도시의 윤곽이 점점 희미해지고 생활의 소음도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을수록 이상한 평온이 밀려왔다. 이제 저 섬에 발을 내딛으면 당분간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옥, 우리는 자발적인 유배지로 기꺼이 입장하고 있었다.

짐짝이 되어 흔들리며 그러나 누구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리조트 공용수영장


"둥- 둥- 둥-"


보트의 엔진 소리가 잦아들고 섬에 가까워지자 심장 박동과 묘하게 닮은 북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선착장에는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일렬로 도열해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트에서 내리자 그 경쾌한 리듬에 맞춰 그들은 우리 목에 하나하나 불가사리 모양의 '행운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투박하지만 정성스러운 그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다.


데크를 따라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가자 세상은 순식간에 초록의 터널로 바뀌었다. 키가 큰 야자수와 이름 모를 열대 식물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정수리를 찌르던 적도의 태양은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렸고 바다향기 대신 흙내음과 싱그러운 풀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체크인은 그 입구의 작은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바닥은 부드러운 모래이고 사방이 트여 바람이 통해서 자연 그 자체인 공간. 우리는 숲이 내어준 그늘 아래서 웰컴 드링크를 마시며 천국으로의 입국 도장을 찍었다.


버기를 기다리며 리조트를 둘러보는데, 시야가 탁 트이며 공용 수영장이 나타났다.

"와, 저기 봐."

바다와 수영장의 경계가 지워진 인피니티 풀. 그 위에는 이미 도착한 여행자들이 선베드에 누워 게으른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수평선과 맞닿은 푸른 물결과 그 위에서 쉬어가는 큰 새,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의 뒷모습.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며칠간 누리게 될 '완벽한 나태'의 예고편 같았다.



2박 묵은 비치빌라


드디어 숲길을 지나 우리가 2박 묵을 비치빌라 객실 문이 열렸다.


"우와~ 이것 봐!" 탄성은 짧고 강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뾰족하게 솟은 높은 서까래 아래, 침대 위에 놓인 'HAPPY HONEYMOON'이라는 글귀였다. 리조트의 정원사가 아침에 갓 따왔을 초록색 잎사귀 하나하나를 오려 정성스럽게 쓴 글씨와 긴 잎을 구부려 만든 하트 모양. 그것은 화려하기보다 다정하고 몰디브의 자연을 그대로 닮은 환영 인사였다.





우리가 선택한 방은 예상보다도 더 크고 웅장했다. 높은 천장 덕분에 개방감은 압도적이었고 방 중앙에 마치 제단처럼 거대한 원형 욕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물을 받아 거품 속에 파묻히고 싶은 유혹이 일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침대 앞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남편이 커튼을 걷어 젖히자, 하얀 담벼락으로 프라이빗하게 감싸진 우리만의 요새가 드러났다. 네모난 개인 풀장 위로 몰디브의 햇살이 보석처럼 찰랑이고 그 너머엔 보라색 쿠션이 놓인 베드가 "어서 와서 누워"라며 손짓하는 듯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대로 뛰어들어도 될 만큼 완벽한 우리만의 풀장.


"여기 오려고 우리가 그렇게 야근까지 해가며 열심히 했나 보다."



비치빌라 앞바다


그리고 반대쪽 앞마당에는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곧바로 닿을 수 있는 새하얀 모래사장과 투명한 옥색 바다였다. 당장이라도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뛰어들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흔이고 긴 비행으로 도착과 동시에 지친 상태였다.






빌라를 둘러보며 감탄 후, 긴장이 풀리자 묵직한 피로가 우리를 덮쳐왔다. 게다가 몰디브에서는 한국보다 4시간이 빨라서 이미 밤이었다. 당장이라도 저 푹신한 침대에 기절하듯 뻗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의무감'이었다. 우리는 이미 거액을 지불한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여행자 였다!


"오빠 일어나, 밥은 먹고 자야지. 한 끼라도 놓치면 안돼."


우리는 좀비처럼 일어나 뷔페로 향했다. 혀끝에 감도는 산해진미보다 '본전'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던 마흔의 첫 저녁 식사였다.


배를 채우고 다시 객실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파도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는 고요한 밤. 운전대 대신 웰컴 샴페인 잔을 든 손, 내비게이션의 불빛 대신 달빛을 머금은 옥색 수영장. 무거운 짐짝처럼 실려온 우리는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자, 드디어 시작이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완벽한 자유가.'


그러나 그때는 미처 몰랐다. 누가 몰디브를 '할 게 없어 지루한 신혼여행지'라고 했던가. 내일부터 펼쳐질 우리의 나날은 스노쿨링과 레스토랑 투어 그리고 칵테일 파티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극기훈련' 신혼여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가올 그 빡빡한 미래를 생각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뷔페
샐러드코너, 모히또와 쥬스




몰디브 도착 첫날의 기억은 환상적인 바닷빛깔, 그리고 졸음으로 요약됩니다.

하지만 진짜 몰디브는 눈 뜬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힐링되셨을까요?

그럼 몰디브여행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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