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항공과 신혼여행 준비물
"멀미약도 주시고요, 후시딘, 아쿠아밴드,
음... 화상연고도 주시고 또..."
약국 앞에서 줄줄이 읊조리는 내 모습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부라기보다는 오지 탐험을 준비하는 백패커에 가까웠다.
마흔에 떠나는 몰디브 신혼여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핑크빛 환상 한 스푼에 생존을 위한 현실 아홉 스푼을 섞어 마시는 쓰디쓴 약 같은 것.
결혼식 준비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날들을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저 멀리 인도양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꿈꿨기 때문이다. 파도 소리를 BGM 삼아 밀려드는 청첩장 봉투를 붙이고, 몰디브의 석양을 상상하며 신혼가구를 보러 다녔다.
막상 짐을 챙기다 보니 마치 전장에 나가는 의무병의 배낭처럼 비상식량과 상비약으로 그득했다. 낭만을 챙기기엔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버린 탓일까?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한 방어구부터 챙겼다. 진정용 마스크팩, 챙이 넓은 모자, 스노클링 장비, 그리고 얼굴용 선크림과 뿌리는 바디선크림의 이중 방어막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생존 물품'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면이다.
어떠한 화려한 메뉴판에도 '얼큰한 국물'은 없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들이키는 라면국물은 한국인의 혈관 속 피와도 같은 것.
부피를 줄이기 위해 컵라면의 컵은 따로 빼내고 면은 하나하나 은박지로 밀봉했다. 마치 귀한 보석을 포장하듯 정성스럽게 넣었다.
그렇게 캐리어를 닫으며 생각했다. '이게 맞나?'
그리고 나는 두 가지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외장하드를 빼버린 것, 그리고 휴대폰 방수팩을 챙기지 않은 것. 비싸게 주고 산 액션캠의 방수덮개의 성능을 맹신한 탓이었다. 이 결정을 우리는 신혼여행 마지막날 몰디브의 투명한 바닷속에서 수없이 후회하게 된다.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출국 96시간 전에 작성해야 한다는 몰디브 입국 신고서 '이무가(IMUGA)'를 작성하며 안도했다.
결혼식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끝낸 다음 날,
아버님이 공항까지 태워주셨는데, 손마다 편지와 용돈도 쥐어주셨다. 그렇게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선택한 날개는 싱가포르 항공이었다.
몰디브로 향하는 하늘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두바이 노선과 싱가포르 노선이다.
당시 우리는 <연애남매>라는 연애 예능을 봤는데, 화면 속 청춘들이 설렘을 주고받던 배경인 싱가포르의 풍경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밤하늘을 수놓던 거대한 인공 나무,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빅트리(Supertree)는 마치 우리가 곧 마주할 비현실적인 여행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경유해야 하면 싱가포르가 좋겠어."
그렇게 우리는 사막 대신 숲을 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싱가포르항공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허니문 서비스 때문이었다.
항공권 예매 후 항공사에 이메일로 신청해야만 받을 수 있는 숨겨진 선물이다. 이륙 후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고 기내에 안온한 공기가 감돌 때쯤, 싱가포르 전통의상을 입은 승무원이 미소를 띠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Happy Honeymoon!"
축하케이크를 주고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3만피트 상공에서 받는 결혼축하는 지상의 축하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달콤하고 낭만적이었다.
싱가포르 항공의 밤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모니터 속 최신영화가 내가 타본 항공사 중에 가장 많았다. 그리고 승무원들의 섬세함은 내 빈속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기내식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않는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괜찮다는 내 손사래에도 담당 승무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기어이 '똠얌 컵누들'을 권했다.
거절했으면 정말 어쩔 뻔했을까. 혀끝을 톡 쏘는 매콤함과 낯선 향신료가 어우러진 이국적인 감칠맛. 그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의 맛이 묘하게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자기야, 허리 괜찮아?"
"아니, 무릎에서 소리 나는 것 같아."
싱가폴 창이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따뜻하고 향이 섞여 있고, 여행자들의 리듬에 맞춰 어딘가 느긋했다. 세계 1위 공항답게 창이공항은 화려하고 거대했다. (1위 인천공항 아니었나?)
실내 폭포가 쏟아지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정원이 있다지만, 피곤한 우리 부부의 눈에는 그저 '끝없이 걸어야 할 길'로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구명줄을 찾듯 정처없이 걸었다. 라운지 앞을 지키고 있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구겨 넣는 것으로 타협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비몽사몽 양치질을 마치고 쪽잠이라도 청해보려는데, 불현듯 현기증 같은 허기가 덮쳤다.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라 생존 신호에 가까운 '당 부족'이었다.
남편은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아까 기내에서 챙겨 온 허니문 케이크를 꺼냈다. 밖이었다면 우아하게 샴페인과 곁들여야 할 사랑의 징표였건만, 우리는 체면도 낭만도 잠시 내려놓은 채 케이크를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콤한 크림이 식도로 넘어가고 혈관에 설탕이 돌자 비로소 꺼져가던 뇌가 반짝였다.
"잠깐, 우리 뭔가 잊은 거 없나?"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라도 반드시, 기필코 수행해야 할 미션이 남아 있었으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고 걷다 보니 사람들 줄이 몰려있는 가게가 보였다.
면세 명품도, 한정판 굿즈도 아닌데 다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사오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후회했다는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바로 '바차 커피(Bacha Coffee)' 앞이었다.
화려한 주황색 틴케이스들이 벽면을 가득 채운 그곳은 공항 한복판에 세워진 마법의 성 같았다. 문을 열기도 전에 코끝을 스치는 진한 헤이즐넛 향기. 그 향은 카페인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커피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이 허투루 붙은 게 아니었다. 우리는 홀린 듯 매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몰디브에는 기념품이랄 게 딱히 없었다. 그래서 싱가폴 창이공항 바샤커피에서 결혼식에 와준 고마운 지인들에게 건넬 선물들을 주섬주섬 담았다.
처음엔 “이게 그렇게 유명해?” 하고 의아했는데, 한국에 와서 “하나 더 사올 걸…” 하고 아쉬웠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 있었다. 바로 싱가포르의 소울 푸드인 '카야 토스트'다.
아주 바삭하게 구워낸 얇은 식빵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진 차가운 버터, 그리고 달콤하고 고소한 카야 잼이 조화로웠다. 한 입 베어 물면 '파사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입안 가득 퍼지는 극강의 단맛은 여행의 피로를 단번에 녹여버리는 맛이었다. (하지만 카야잼을 사오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4시간 남짓의 비행 후, 창밖으로 짙푸른 인도양이 끝없이 펼쳐지더니 이내 비현실적인 에메랄드빛 고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으로만 보던 산호섬인 몰디브의 아톨(Atoll)이었다.
"와, 저게 진짜 바다색이라고?" 남편의 탄성에 나도 모르게 창문에 이마를 대고 끄덕였다.
포토샵으로 채도를 한껏 높인 듯한 쨍한 바다색.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오기도 전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몰디브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갔다. 낭만보다 현실을 더 많이 싸 들고 왔지만 그 현실조차 우리 신혼여행의 중요한 결이 되어주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주 금요일, 몰디브 신혼여행기 연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