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디브의 밤은 길고, 우리의 간(Liver)은 짧다
(앞 에피소드와 이어집니다.)
"아, 졸려. 가서 바로 눕자."
레스토랑 문을 나서며 내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하루의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었다. 촛불이 흔들리는 테이블,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나눈 대화,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까지. 충분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이 여운을 베개에 눕힐 시간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지잉- 지잉-
"로빈이네?"
우리 담당 버틀러였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친절했지만, 밤 8시가 넘은 시각에 걸려온 전화치곤 묘하게 설레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해변에서 칵테일 파티가 시작됐어요. 오실래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봤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낭만은 충분히 즐겼는데...' 막 돌아서려던 순간, 로빈의 목소리가 다음 말이 이어졌다.
"몰디브 전통 춤 공연도 있고요, 모든 칵테일은 무료 무제한입니다."
무제한?
그 단어가 우리 사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마치 암호처럼 졸음을 깨우는 주문이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강력한 각성제였다. 신혼여행에서 칵테일 파티를 빼먹는다는 건, 마치 바다에 와서 발만 담그고 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게다가 원주민 춤이라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가자!"라는 구호조차 생략한 채, 홀린 듯 동시에 뒤로 돌았다. 발걸음은 숙소가 아닌 해변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졸음은 이미 몰디브 밤바다 저 멀리로 떠나보낸 뒤였다.
"와... 이거 뭐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해변은 화려한 조명과 둥둥거리는 북소리로 진동하고 있었다. 이내 내 마음도 숨쉬듯 쿵쿵 거렸다. 모래사장 위에는 색색의 빈백들이 마치 거대한 조약돌처럼 놓여 있었는데, 신혼여행의 성지답게 약속이나 한 듯 정확히 두 개씩 짝지어 있었다.
우리는 입구에서 나눠주는 웰컴 칵테일을 입장표처럼 받아 들고, 그 커플들의 틈바구니 속 중간쯤 비어있는 빈백에 가서 앉았다.
바로 앞에서는 낯선 춤사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몰디브 전통 춤이라고 했다. 아니, 춤이라기보다는 어떤 의식에 가까웠다. 북소리는 심장 박동보다 빨랐고, 원주민들은 그 찰나의 박자를 잘게 쪼개며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한 명이 북소리에 홀린 듯 독무를 시작하고, 몇분 뒤 스무명의 무용수가 파도처럼 합세해 거대한 군무를 만들어냈다.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질서가 있었다.
공연자가 관객석을 향해 손짓했다. 함께 춰볼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열광적이고 어려워 보이는 춤판에 선뜻 뛰어들 관광객은 없었다. 정적을 견디지 못한 원주민 무용수가 다시 뛰어나와 독무를 이어갔다. 나 역시 마음은 이미 무대 위에서 현란하게 스텝을 밟고 있었지만, 현실의 몸은 빈백 깊숙이 파묻혀 "대단하다"는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Mr. KIM ! 왜 나가서 춤 안춰요?"
어느새 다가온 버틀러 로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나도 칵테일 잔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추고 싶지만, 출 수가 없어요. 정말 대단한 춤이네요." 로빈은 알겠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춤공연을 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30분쯤 지났을까. 우리는 동시에 깨달았다. 우리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을.
"여보... 나 졸려."
그랬다. 사실 우리 부부는 (특히 나는) 소위 '알쓰(알코올 쓰레기)'였다. 술을 몇 모금만 마셔도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가성비 좋은 간을 가지고 있었다. 깜깜한 해변, 드문드문 빛나는 랜턴, 여기는 저녁 9시지만 내 몸은 한국의 새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칵테일 한 잔이 자장가처럼 스며들었다.
'무제한'이라며?
여기 있는 술 다양하게 마셔버리겠다며 눈을 번뜩이며 달려왔는데... 고작 한 잔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칵테일을 종류별로 맛보고 싶다는 야망은, 수면욕이라는 본능 앞에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그나마 나보다 나은 남편은, 사력을 다해 '한 잔'을 더 마셨지만 그것이 우리의 한계였다.
호기롭게 달려온 것치고는 너무나 부끄러운 스코어였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면서도 우리는 묘하게 아쉽지 않았다. 로빈이 해준 말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칵테일파티는
매일 밤 열린다고 했으니까.
저녁 8시나 9시만 되면 해변은 다시 축제가 시작되었다.
월요일은 리조트 주최 파티, 화요일은 '뮤직 나이트', 수요일은 전통 춤 공연, 금요일은 '불금 파티', 주말에는 '위켄드 스페셜'.. 이름만 바뀔 뿐, 공짜 술과 음악이 흐르는 파티는 매일 밤 해변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오늘 놓치면 끝"이라며 달려갔던 우리는 그제야 안도했다.
우리는 남은 일정 동안 '무제한의 유혹'을 즐기기엔 체력이 모자라 몇 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웠다.
몰디브의 밤은 길었다. 그리고 관대했다. 마흔의 신혼여행이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배우는 것'임을 깨닫는 밤이었다.
하지만 그 관대함도 잠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몰디브가 숨겨둔 가장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