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후의 소회
격무에 지쳐 들어온 저녁,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연락과 부탁을 받고 모두 잠든 밤에 약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수한 고민과 좌절, 타협, 그리고 포기가 적절히 더해진 선택을 내린 뒤 ‘이게 정말 맞는 길인가?’라는 고민도 사치일만큼 정신없이 살아온 2019년 하반기. 아직도 내 눈은 문서의 오타를 예리하게 잡아내고 통화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은 여전히 나를 울컥하게 하지만, 이제 난 더 이상 자랑스러운 한국은행의 직원이 아닌 그저 작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하는 이민자일 뿐이다. 아등바등 살면서 영어는 좀 늘었다만 그래 봐야 죽기 전에 이 동네 중학생만큼은 할 수 있으려나?
텍사스에서 학위를 마치고 새 직장이 있는 버지니아로 옮겨서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 교회, 아이 학교 커뮤니티... 매번 반복되는 자기소개의 끝은 거의 언제나 “그래서 한국에서는 뭐 하다가 오셨어요?”라는 질문이곤 했다. 누구 앞에서고 부끄러울 일 없는 “한국은행”이라는 답변을 하기 꺼려졌던 이유는 이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굉장히 일관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아니 그 좋은 직장을 왜..?”
10년 가까이 일했던 내가 아무렴 당신들보다 한국은행 좋은 걸 몰라서 미국까지 왔을까. 이 말을 꾹 씹어 삼키면서 한번 더 생각나는 여섯 살 내 아들 태민이. 우리 귀한 아들.
말이 느리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게 신경 쓰였지만 자라면서 괜찮아지겠거니 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게 낫지 않겠냐”던 어머니의 조언도 흔한 노인네의 잔걱정으로 치부했었지. 등쌀에 떠밀려서 갔던 병원에서 ‘아직은 판단하기에 어린 나이니 좀 더 보자’했던 말의 행간을 읽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감당할 엄두가 안 나서 외면했던 걸까?
그 후 2년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적으려면 책 한 권은 가볍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영어를 제대로 못하던 와이프는 Austin 지역의 특수치료 기관을 찾아다니며 거의 준 전문가가 되었고 – 이 정도 영어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역시 엄마는 강한가 보다-,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미국 공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좋은지,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얼마나 잘 성장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장애학생 1~2명당 교사 한 명이 붙는 학교는 한국에 없다. 최소한 내가 아는 범위에는). 무엇보다도 장애아들을 보는 시선이 한국과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달랐고, 이 부분을 포기할 수 없었던 와이프는 나의 학술연수가 끝난 다음에도 아이와 함께 미국에 남기 위해 유학생으로 신분 전환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미국 영사관이 비자 발급을 거부해서 결국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내가 영사관 담당자여도 30대 후반의 자녀 동반 여성의 비자 신청을 순수하게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 너무나 잘 알기에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소중한 것을 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해야 할지 등가교환이라고 해야 할지... 다만 포기했던 것조차 큰 자산이자, 의미, 인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 살면서 되새겨야 할 큰 교훈이 되었다. 한국은행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코딩 한 줄 쓸 줄 모르는 재무쟁이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직업을 얻었고, 잠시 옆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배와는 아직도 때때로 만나 함께 식사하고 안부를 묻고 있으며, 매주 만나 식사하고 같이 운동하는 소중한 동기도 한국은행이 준 소중한 인연이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기회가 되어 여러분께 글로나마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어떻게 내가 지난 모든 것을 잊어 넘길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Skid Row의 곡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Remember yesterday.. walking hand in hand
Love letters in the sands.. I remember you.
Through all the sleepless nights, through every endless day
I wanna hear you say, "I remembe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