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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Dec 10. 2021

생각지 못한 아들의 잔머리

자폐인의 시각추구 이야기

자폐인의 특성 중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감각 추구 (Sensory Seeking)'다. 감각 추구란 팽이나 공 등을 계속 돌리면서 홀린 듯이 쳐다보거나 (시각), 손바닥 사이에 물건을 끼우고 계속 비비면서 (촉각) 특정 자극을 계속 받으려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비자폐인의 경우 어릴 때 이런 경향을 보이다가도 커가면서 자연스레 개선되는 반면, 자폐인의 경우 시간이 지나도 이런 증상이 유지되거나 개선이 더딘 경우가 많다. 


아들 태민이의 경우 시각 추구가 꽤나 심한 편이다. 태민이의 시각 추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어릴 때는 엘리베이터에서 반짝이는 버튼과 숫자를 보고 싶어서 내리기를 거부한 것도 여러 번이었고 자판기 버튼을 마구 누르면서 그때마다 디스플레이에 나타나는 숫자를 보며 황홀해하기도 했다. 한때는 빨갛고 푸른 신호등 불빛에 관심이 돌려지나 했더니 요새는 다시 숫자 홀릭이다. 건물 외벽에 붙은 전자계량기의 깜빡이는 숫자를 보면서 펄쩍펄쩍 제자리 뛰기를 하기도 하고, 리모컨의 숫자를 자기가 좋아하는 50으로 매번 맞춰 놓는 통에 우리 집 실내 온도는 언제나 화씨 50도 (섭씨 10도)다. (가끔은 밖보다 집 안이 더 추울 때도 있지만, 난방비 줄이는데 아들이 협조하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러던 태민이에게 요새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우리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는 문 앞마다 전등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아이는 전등마다 미묘하게 색이 다른걸 용케 구별해서 "208, Yellow! 308, White!" 하며 떠들어댄다. 단지 내 산책을 하다가 잠시 딴생각을 하면 어느새인가 다른 동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그곳의 전등을 구경하기도 하고... 도대체 저게 뭐가 재미있는 건가 짜증이 솟구칠 때도 있지만 '저 녀석도 내가 왜 게임하는 건지이해 못 하겠지?' 생각이 들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에 그냥 둘 때가 많다. 






"아빠 빠빠이, Later"


저녁을 먹고 한국 사무소와 회의를 하고 나오니 아이가 뜬금없이 내 손을 잡아끌며 저런 말을 꺼냈다. 이 녀석의 엉뚱함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갑자기 무슨 빠빠이? 와이프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단다. 한참 고민하다가 "아빠 어디 가야 돼? 지금 밤인데?"물으니 그렇단다. 밤늦게까지 불야성인 서울이면 모를까, 미국 버지니아에서 저녁 7시~8시면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아 딱히 갈 데도 없다. 아니 그걸 떠나서 갑자기 밤에 나보고 왜 가라는 걸까?  


아이는 자꾸 배실 배실 웃으며 내 손을 끌고 현관문으로 향한다. 그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태민이 전등 볼래? 하니 바로 "YES!"라고 하며 쏜살같이 문을 살짝 열고 맞은편 집 앞에 달린 전등을 보면서 행복하게 낄낄거리다가 문을 닫는다. 


아이가 전등을 본답시고 밖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다치거나 길을 잃을 위험이 있기에 아내는 아이가 문을 혼자 열면 크게 혼내곤 했다. 그래서 내가 나갈 때면 아이는 꼭 문에 바짝 붙어서 문 바깥의 전등불을 한번 본 뒤 문을 닫는 식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곤 한다. 오늘 일어난 '아빠 빠빠이' 사건 또한 '전등을 보고 싶다' => '하지만 문을 내가 열면 엄마한테 혼난다' => '아, 아빠를 밖으로 내보내면 문이 열려서 전등을 볼 수 있겠구나!'라고 아이 나름대로 치열하게 잔머리를 굴린 결과였던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문방구를 갔을 때 가끔씩 장난감을 일부러 거칠게 다룰 때가 있었다. 주인의 눈치에 엄마가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인데, 엄마가 장난감을 사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내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문을 맘대로 열었으니 아이를 혼내야 했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몇 단계를 거쳐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보고 감동한 탓에 혼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 이런 잔머리라면 기꺼이 속아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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