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찾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거란다.
말라리아에 걸린 글로리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
남자아이를 선두로 히잡을 쓴 올망졸망한 여자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중에는 교회에 나오는 사이디도 보여 아이들을 불렀다.
(교회에 나오는 몇몇의 아이들은 주일에는 교회.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다니고 있다.
대대로 무슬림 집안이다 보니 아이는 그렇게나마 위태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Unaenda Wapi?” (어디가?)
그런데 어려운 것을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볼 뿐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냥 반가운 마음에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아이들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도대체 아이들이 어디를 가길래 대답을 못할까 더 궁금해진 나는 다시 물었다.
“Unaenda Wapi?”
내가 연신 어디 가냐고 묻자 선두에 있던 남자아이가 유창한 스와힐리어로 대답을 한다.
집이요. 학교요. 가게요. 친구네 집이요. 등 단답식의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당황했다.
아뿔싸. 어쩌자고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을까? 대답을 한들 알아듣지도 못할 거면서.
당황한 나의 입에서 에? 뭐라고? 한국말이 튀어나오자 곁의 선교사님이 통역을 해주신다.
“그냥 걷는데요.”
아주 오래전 유행가 가사가 생각이 났다.
빗속을 혼자 걷다가 옛 생각도 나고 해서 처음에는 그냥 (공중전화로 너에게 전화를)걸었는데 결론은 너를 사랑해로 고백해 버리는 그런 노래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냥 걷는다는 탄자니아 아이들을 보면서 갑분싸 연인에게 그냥 고백을 해버리는 유행가가 생각이 났는지.
“이곳의 아이들은 그냥 걷는 게 놀이예요.”
놀이터도 장난감도 마땅히 놀 것도 없는 아이들이 흙을 파고 놀 듯이 그냥 걸으면서 논다니.
나는 마치 나의 아들내미가 빗속을 우산 없이 그냥 걷다가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본 것 마냥 마음이 짠했다.
그 후로도 그냥 걷는 아이들을 가끔씩 만났고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짠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따라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따라가 봤다.
그냥 함께 걷기만 했는데도 아이들은 신기해하면서 좋아했다.
입이 귀에 걸린 아이들은 내 손을 잡고 내 옷자락을 잡으면서 나와 함께 발을 맞춰 걸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너희들의 꿈은 뭐야?” “아픈 곳은 없어?” “지금 고민이 뭐야?”.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듣을게 뻔해 입을 닫았다.
대신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Je una furaha?” (너는 행복하니?)
아이들이 에?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긴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기는 했다.
나라도 당황했을 것이다.
길을 가고 있는데 외국인이 나에게 "당신 행복합니까". 물어보면 나 역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술 더 떠 “Unafurahi lini?” (언제 행복해?)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대답대신 아이들은 배시시 웃기만 한다.
나는 더 나아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뭐야?"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닫았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알면? 내가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문득 나는 그냥 걷는 아이들에게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어쩌자고 행복을 운운했을까?
한때 나 또한 행복추구자였다.
정체도 알 수 없고 정확한 답도 없는 행복을 찾기 위해 살았다.
인생에서 추구해야 하는 가장 우선의 것, 목적이 행복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나의 이야기를 할 때는 해피엔딩으로 쓰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해피엔딩 앞에 머뭇거린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거다. 저거다 정의 내리기에 그렇게 간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행복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른데 내가 내놓는 행복의 결말이 과연 행복일까? 확신이 없었다.
그것이 억지스러운 만족으로 보이거나 게으르게 안주해 버린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결론을 내리기에 주저했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깨달아갔다.
행복이라는 것이 인생을 걸고 쫒아야 하는 거대한 무엇이 아닌 사소한 무엇이라는 것을.
작정해서 가지는 것이 아닌 문득 찾아오는 것.
언듯 스쳐가는 풍경같이. 찾는 것이 아닌, 발견되는 것.
길 가다가 본 어떤 야생화 같이 섬광처럼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이 행복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행복 따위 없다는 것도 살아보니 알아지더라.
고난이 이어지는 것이 통상적이고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달빛이 한번 비치듯이 그렇게..
문득 섬광처럼 한 번씩 얼굴을 내밀고 사라지는 것이 행복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아이들과 함께 행복을 발견하고 싶었다.
보물찾기 하듯 여기저기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닌 길 가다가 문득 발견하고 싶었다.
아이들과 챔챔이로 소풍을 갔다.
아이들은 연신 깔깔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돌아오는 길. 아이 한 명이 내 손을 잡고 수줍게 고백하듯 이야기한다.
"Nina furaha ' (나는 행복해요)
그냥 걸었던 아이가 발견한 행복 속에서 나와 아이들이 함께 있어 나도 행복했다.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의 대부분이 고난이고 행복은 잠깐이다 하더라도 우리의 엔딩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이란 삶이 계속되는 한은 포기하지 않기로 하는 것, 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냥 걷고 있는 아무런 희망 없어 보이는 아이들 역시.
아이들의 인생은 꽃길이 아닐 것이다.
그냥 걸었던 길처럼 울퉁불퉁한 막막한 흙먼지 이는 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이 다치고 상처입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어떤 순간에라도 너희들의 삶을 희망하라고.
희망은
울퉁불퉁한 길을 걷더라도 작은 들꽃을 발견할 때 행복을 느끼는 그런 마음이라고.
그리고 나에게도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