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했어
이제 겨우 열 살이 되었을까?
첫눈에 봐도 사흘에 피죽 한 그릇 얻어 먹지 못했을 것 같은 빼빼 마른 여자 아이가 기역자 자세로 엎드려 빨래를 하고 있다.
아이 곁에는 아이 키만한 빨래가 쌓여있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놓은 여자 아이의 남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땅바닥에 앉아 흙을 주워 먹으면서 놀고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서툰 걸음걸음을 내딛으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동생이 울음보를 터트렸지만 빨래를 하고 있는 누나는 무심하게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빨래를 한다.
누나의 무심함에 동생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자 집 안에서 나온 아이들의 엄마가 울고 있는 아들을 안아 빨래를 하고 있는 어린 딸의 등에 업혀주더니 자신은 의자에 앉아 콩을 고르면서 이웃 아줌마와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범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을 이미 시에라리온에서도 많이 봐왔고
이곳에서 노동하는 아이는 학대받는 것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곁에 엄마가 없었다면 화가 좀 덜 났을까?
하지만 그녀가 남편 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 역시 가난과 허기와 노동에 절여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기에 어린 딸아이에게 육아와 살림을 맡기는 그녀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나의 엄마도 그랬었다.
바람나서 집을 나가버린 남편의 부재가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우울증을 앓았던 엄마는 언제나 누워있었고 울고 있었다.
살림이나 육아를 감당하기엔 엄마는 힘이 없었다.
나와 어린 남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엄마는 겨우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동생 잘 챙겨'라는 부탁으로 엄마의 마음을 대변했다.
‘나는 지금 너희들을 잘 키울 힘이 없단다’
나는 엄마가 준 돈으로 동네 우동집에서 우동을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입을 옷이 없으면 빨래를 하고 쓰레기 더미에 앉을자리가 없으면 청소도 했었다.
빨래가 쌓이고 먼지가 쌓이고 쓰레기가 쌓이면 엄마는 일어날 줄 알았지만 엄마는 몇 달이 지나도록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힘들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저 엄마가 얼른 힘을 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만 울고 우리를 향해 웃어줬음 했다.
빨래와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갈 때마다 나는 엄마가 저렇게 죽으면 어떡하지? 걱정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 역시 나를 떠나는 것으로 죽음이 주는 슬픔과 아픔보다 더한 슬픔과 아픔의 생채기를 나에게 남겼다.
주일날 어린 동생들을 업고 걸리고 예배드리러 오는 아이들을 보니 내 아이가 어렸을 적의 엄마였던 내가 생각이 난다.
일요일만큼은 편하게 좀 있고 싶어서 아이를 동네 교회에 보냈던 나는 아이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던 시간. 혼자 술을 마셨고,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이 힘들어서. 인생이 막막해서 울었다.
울면서 나의 엄마를 생각했고, 이해했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던 나는 어느새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인 내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해빠졌을까? 어찌 이다지도 삶의 지혜가 없을까? 왜 이렇게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까? 왜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란 말인가? 나는 왜 사랑받지도 하지도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나는 그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렸다.
엄마. 아빠가 날 키우지 못해서.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들의 DNA가 불량해서.라고.
내가 받아야 할 사랑과 훈육을 받았다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부모의 헌신과 사랑으로 자란 이들을, 부모와의 따뜻하고 애틋한 추억을 가진 이들이 부러웠고 부러웠고 미웠다.
마치 내 몫을 빼었간 사람들처럼 미워하고 질투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언젠가.
집에 똥을 퍼러온 똥 지기 아저씨한테 이 깨진 그릇으로 물을 줬다고 엄마한테 엄청 맞았다는 어느 권사님의 엄마와의 추억담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진 적이 있었다.
진짜 내가 갖고 싶었던 엄마는 따뜻한 밥을 해주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집안을 반들반들 청소하고 누워있지 않는 건강한 엄마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사람과는 어떻게 사귀고 잘 이별해야 하는지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엄마였구나 싶었다.
'나도 그런 엄마가 갖고 싶었어요'. 하고 우는 나에게 '네가 그런 엄마가 되면 되지.' 권사님은 나를 위로했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래요? 나는 받지도 못했고, 배우지도 못했다구요."
엄마가 된 이후에는 자책과 자학과 원망의 크기와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고 깊어졌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 자책은 나의 인생을 더욱 가난하게 했다.
나의 엄마에게 화가 났다.
엄마인 나에게도 화가 났다.
왜 우리 모녀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을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알아갔다.
‘좋은’의 기준은 없고, 그래서 답도 없다는 것도.
아이가 나를 사랑해 주었다.
‘좋은 엄마가 아니어도 돼. 엄마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낳고 키웠잖아. 그거면 됐어.’
아이를 통해 나를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고 배웠고 받았다.
나를 전도한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엄마로서 자라 갔다.
뭐가 뭔지 몰라 허둥대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안절부절못하다가 자책하고 절망하고 넘어졌다 자빠졌다 하는 동안 엄마의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내민 따뜻한 손을 잡고 그들이 건네는 다정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 도전받고 부딪혀보다 보니 이제 30대가 된 딸의 엄마가 되었다.
나 혼자 아이를 키운 게 아니었다.
12살 어린 나의 곁을 떠났던,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엄마 잃은 남매의 엄마로 2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뒤늦게 엄마의 부고를 전해 들은 나는 엄마가 누군가의 엄마의 인생을 살았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도 나의 아이처럼 엄마에게 이야기해 줄걸.
‘엄마면 된다고’
내가 갖고 싶은 엄마는 그냥 엄마였으면 되었고, 내가 되고 싶은 엄마 역시 그냥 엄마이면 충분하다고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나의 프레임이 깨진다면 가난하지만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려는 엄마들의 사랑이 보일 것이다. 그 사랑이 아이들을 지킬 것이다.
그 사랑을 응원하며 함께 돕는 손길이 되어주고 싶다.
내가 엄마의 마음을 가진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배려로 엄마로 자랐듯이,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이곳의 엄마들이 엄마로 성장할 수 있는 따뜻한 햇살 한 자락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