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녀의 정신연령이 서너 살 어린아이 보다 어리다는 것을.
그냥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여인으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처음으로 만난 성도였다.
그녀는 외국인인 나를 보고도 놀라지도 의아해하지도 않고 그냥 빙긋이 웃어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책에서 배운 대로 스와힐리어로 인사를 했다.
Salama. Habari za Asubuhi. Nimefurahi kukutana. Nimetoka koreakusini. Jina lagu ni BOM
(반가워요.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나의 이름은 봄이에요)
나의 말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번에 나는 질문을 했다.
Jina lako ni nani? Nyumbani ni wapi? (이름이 뭐예요? 집은 어디예요?)
그녀는 대답대신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비비 꼬았다. 그렇게 부끄러운가?
거구의 중년여인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한 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으니 좀 민망하기도 했다.
그때, 10살 정도 된 소년이 교회로 걸어 들어와 그녀의 곁에 앉자 그녀는 나에게 아이를 가리키면서 'Baraka'라면서 아이를 소개해 준다.
그리고는 ‘Mama Baraka. Mimi ni mama Baraka' ( 나는 바라카의 엄마입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그제야 알았다.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카가 그만하라고 툭 쳤을 때야 그녀는 입을 닫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마마 바라카가 된 이후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잊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이름이 되어버린 Mama Baraka.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가 가장 확실하게 하는 말은
Mimi ni Mama Baraka (나는 바라카의 엄마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듯 바라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바라카가 어떻게 임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가 누군들, 어떤 상황에서 임신이 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바라카의 엄마라는 것뿐이다.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지능의 그녀가 아이를 낳고 10년 동안 건강하게 키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당연히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어머니 역시 그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정신지체 장애에다 치매까지 더했으니 마마 바카리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바라카가 아빠의 존재를 모르듯 마마 바라카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과 상태가 똑같은 엄마의 딸로 살다가 바라카의 엄마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Baraka [축복]으로 지었다.
절망이자 저주였을 정신지체를 대물림받은 그녀는 아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다행히 바라카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태어났다.
말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또래들과 어울려 잘 놀고 잘 웃고 삐치기도 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고 기본적인 덧셈. 뺄셈도 하지 못한다.
학습적인 뿐 아니라 가정에서 배워야 할 예절과 교육적인 부분들을 배우지 못하고 잘못을 했을 때 훈육할 사람이 없다. 오히려 바라카가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와 엄마를 가르쳐가면서 살고 있다.
불이 잘 붙는 장작을 고르는 법을. 빨래에 비누칠을 골고루 하는 법을. 쌀의 돌을 고르는 법을. 그러다가 가끔은 자신이 팔 걷어붙이고 장작에 불을 피우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곤 한다.
다행히 비비 바라카의 형제들이 자주 들러서 가족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교회의 성도들과 선교사님도 자주 들러 돌봐주고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바라카를 저런 환경가운데에서 자라는 것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선교사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마가 바라카를 너무 사랑해요. 서툴지만 엄마가 되는 것을 배워가고 있어요"
어떤 인생이 잘 사는 인생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이 없듯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인가?라는 질문에도 정답이 없다.
"마마가 바라카를 너무 사랑해요"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히려 딸에게만큼은 쌉T가 되곤 했던 나는 마마 바라카의 사랑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제 돌이 지난 Musa의 엄마 Mama Musa 역시 서너 살의 지능을 갖고 있는 지체 장애인이다.
그녀 역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떻게 임신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배가 조금씩 불러오더니 만삭이 다되어서야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임신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사를 낳았다.
임신이 어떻게 되는지 출산을 어떻게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지했던 엄마였지만 무사가 태어나자마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젖을 물렸고. 기저귀를 채우고 업고 다녔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있어서 함께 무사를 키우고 있다고 하니 바라카의 환경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무사를 업고 거리를 목적 없이 걷고 있는 마마 무사를 자주 만난다.
행여 무사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꽁꽁 야무지게도 싸맨 그녀가 나를 보자 뛰어와서 무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내가 안으려고 하면 손도 못 대게 한다.
행여 외국인인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갈까 봐 그런 것이다.
(이곳에는 외국인이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미신 같은 소문이 있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에게 '무사가 예뻐서 그렇다. 데려가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손짓 발짓으로 말해준다.
아니 이럴 거면 왜 자랑하듯 보여주냐고? 좀 빈정 상할 때도 있지만 정말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걱정하지 마. 무사는 너의 아들로 잘 클 거야. 네가 이렇게 사랑하잖아."
절망에 익숙한 그녀의 인생에 찾아온 아이를 그녀들은 축복(Baraka)으로 건짐 받은 아이(Musa)로 품었다.
그 품에서 아이들은 그녀의 아들로 자랄 것이다.
이름처럼 엄마의 축복이, 엄마의 인생을 건져주는 이가 되어줄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들 곁에는 가족이. 교회가. 마을 공동체가 있다.
그들이 함께 아이가 엄마의 아들로 자랄 수 있게 돕고 있다.
그 사랑이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주리라 믿고 싶다.
그리하여 바라카가 모두의 축복이 되기를.
무사가 사랑으로 건짐 받은 인생이 되기를.
그렇게 아이들이 엄마의 아들로 자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