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팔트 고구마 May 16. 2021

내 인생 최고의 생일선물

최선이라는 말의 의미

 일을 시작하고 나서 느낀 안정감은 예상보다 컸다. 호주 와서 일자리만 잡아도 어지간히 사는데 필요한 건 끝난다는 말이 그저 나온 게 아님을 실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새로운 일을 하나 더 찾아 나섰다. 일자리를 찾느라 흘려버린 내 한 달 반의 시간을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하는 마음과 기대치에 못 미치는 시급 때문에 좀 더 빨리 돈을 모아야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첫 일자리 잡기는 그렇게 어렵더니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부터 다음 일자리 찾는 건 쉬웠다. 다행히 그동안의 고생과 노력 그리고 일자리 찾는 지난 경험들은 헛되지 않았다. 다음 일자리를 찾는데 구체적인 요령을 깨달았고 다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첫 일자리를 시작한 지 한 달 후 고기 공장 일을 하나 더 시작했다. 말 그대로 몸을 갈아서 돈을 벌었다. 보통 3-4시간 정도만 자며 몸을 쓰는 생활을 계속했으니 눈만 감으면 금방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생활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하면 언제든 관둘 수 있다는 사실과 선택에 대한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가 고생의 시간이 지난 후 원하는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선명한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계획에도 없던 차 구입. 그것도 경매로. 가슴 쫄깃한 시간이었다.


 하루에 많이 자야 4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이 몇 주째 이어졌다. 뺑소니 이후 새로 산 자전거를 도둑맞았기에 집주인이 준 고물 자전거를 고쳐 타고 출퇴근을 했다. 자전거로 출퇴근 시간만 1시간이 넘게 걸렸고 펑크라도 나는 날에는 그날 잠자는 시간은 더 줄었다. 그런 일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어났고 결국 나는 너무 피곤해서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자기 위해 계획에도 없던 차를 샀다.


 주말도 일했던 내게 잠시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던 집주인은 자기가 자는 시간에 들어와서 자고 있을 때 나간다며 내게 도대체 뭘 하냐고 물었을 정도로 일했다.






 바삐 살던 중 생일이 다가왔다.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고민을 하다 생일날 데이 오프를 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표현이 손발 오그라든다고 생각하지만 그땐 정말 날 위해 뭔가를 주고 싶었다. 나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 그것은 ‘잠’이었다.


 생일날 아침, 평소의 기상 시간에 습관적으로 눈이 떠졌다. 데이 오프 낸 게 억울해서 눈을 다시 감았다. 잠을 더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곧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고민한 시간부터 호주로 오기까지 길에서 보낸 시간과 지금 이곳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순간까지의 모든 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호주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고생한 지난 시간과 일을 두 개 하면서 몸을 스스로 갈아내는 삶은 피로에 찌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잠에서 깬 뒤 침대 위에서 출발부터 여기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생각지도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이 만족감에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간직한 채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고 통장에는 당장 여행을 해도 충분한 몇 만 달러의 돈이 쌓여 있었지만 그 순간엔 그게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느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만족감이었다. 이전엔 내가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곧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확실한 미래가 그려져서였을까? 이렇게 노력하는 나 스스로가 기특하다고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한편 내일 다시 시작되는 고생의 컨베이어 벨트를 쉼 없이 뛰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금 마음속 가득한 행복감만을 가지고 영원히 깨지 않는 잠 속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벅찼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그렇게 치열하고도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8년간의 세계일주 모든 시간을 통틀어 이만한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 소설가 조정래 님이 말했다지. 최선이란 단어는 ‘내가 나 스스로의 노력에 감동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항상 거기 있었지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꽃을 살펴볼 여유도 생겼다.


 그날 아침 짧은 사색의 시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하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작게 허락해준 잠의 시간과 함께 얻은 감정은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위대한 사람들이 말했던 행동과 그에 따른 만족감은 이런 느낌이었나? 이걸 지금에서야 알다니. 그들은 진정 이러한 만족감을 알고 살았겠구나. 난 지금 최선을 다해서 잘 살고 있는 거다. 잘 하자. 하하하!'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은 호주 생활에 집중했다.


이전 07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