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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초라한 대관식

영화 [후계자] 리뷰

by Munalogi

이 글은 영화 [후계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선형, 혹은 소용돌이 구조;아버지의 굴레
사진 출처:다음 영화

닮지 않으려고 죽을 만큼 노력했다는 문장 하나로, 엘리아스(마크-안드레 그론딘)와 죽은 아버지 사이는 정의할 수 있다. 이미 고인이 되어 물리적인 연결고리가 완벽하게 끊어졌지만, 그 흔적마저 진절머리 난다는 듯. 엘리아스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을 밀어내려 애쓴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가서 만난 아버지의 호의적인 친구 도미니크(이브 자크)마저도. 그러나 지하실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비밀을 마주한 후부터. 애석하게도 엘리아스의 머릿속 회로는 자신이 연습해 온 모든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다만 아버지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혹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마도 아버지가 납치한 도미니크의 딸을 본 순간에 너무 당황해서 이성을 잃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는 아버지와 달랐을까?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고개를 가로젓는 대답 외에는 줄 수가 없다. 분명 엘리아스에게는 기회가 많았다.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었고, 자신이 처방받은 안정제의 양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행하는 모든 행동들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구해주겠다는 허울뿐인 말은 육탄전을 벌이는 둘 사이에서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다. 다시 한번 자신의 목숨이 좌지우지될지도 모르는 순간에, 그녀는 제이크(엘리아스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엘리아스보다 그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피해자에게 있어 제이크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몸이 지하실의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에. 그는 떠올렸을까. 벗어나고 싶지 않던 그 박수갈채를 받으며 가볍게 뛰었던 나선형의 무대를. 발을 들인 순간부터, 출구로 가기 위해서라면 가장 깊은 곳까지 가야만 했던 그 무대를.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물이 가득 찬 세면대에서 퐁 하고 뽑힌 마개 사이로, 소용돌이처럼 떠내려가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위해 찾은 곳에서도 마주해야 했던 나선형 계단에서 그는 일 핑계를 대며 탈출하려 했다. 마치 아버지와의 이 보이지 않는 연 마저 끊어내려는 듯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절반은, 심장질환 말고도 받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아버지의 DNA로 이뤄져 있었으므로. 이 지긋지긋한 나선형은, 자신을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참이었으니까.




어린 왕자;대관식과 후계자 사이
5c5f98e38ee34ab7d4718a636880845545eec9c6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가 패션 잡지의 커버를 촬영하기 전에. 마케팅 팀은 그를 꾸미게 될 미사여구를 정한다. 그렇게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르게 된 단어는 후계자.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이 쟁취했다는 뉘앙스보다는 누군가가 점찍어 놓았다는 이미지, 즉 소극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보류된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한 단어는 대관식. 정통으로 인정받는 현장에 대한 단어이자 어린 왕자인 그가 대관식 이후로는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난다는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기에, 그를 향한 찬사를 담은 단어로 결정된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그가 쥐고 있는 커버에는 후계자라는 말이 명확하게 박혀있다. 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두려움도, 회한도 있지만 묘하게 결심했다는 감정과 함께 약간의 체념도 보이는 듯하다.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저주로 인해. 그는 과실치사로 인한 살인을 저질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체 유기(혹은 은닉)까지 저지른 상황이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소녀의 아버지이자 죽은 부친의 친구였던 도미니크에게 간접적이지만 잔인하게 사실을 전하기까지 한 후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아버지로 인해, 아주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음을 그때 인정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운명에 반하기(against. fall in love 아님) 위해 인생을 바쳤다 한들. 그를 만들어 낸 창조주의 명령마저 거역할 수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겪었으므로. 비록 아버지와는 반드시 달라야만 한다는 심정으로, 허둥거리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 믿고 싶었겠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치밀하게, 아버지만큼 은밀하게 소녀의 시체를 처리했으니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쥐고 있는 자신의 것을 단 하나도 놓지 않기 위해서.


알량한 마지막 양심으로 진실을 전하긴 했지만. 그는 도미니크에게 여백만을 남겼다.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도미니크가 그의 딸과 같이 지옥으로 뱅글뱅글 빨려 들어가는 것을, 그는 결국 막지 않았다. 그저 애처로운 눈물만을 흘리며 자신만 유유히 나선형의 가장 깊은 지옥에서 다시 빠져나오기 시작했을 뿐.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고해성사를 제목으로 남긴 채, 그는 남들에겐 대관식으로 보일 그 표지를 일어서는 직전까지 바라본다.




총평;임계점까지 가는 힘든 여정
df3d4a22ba7aaa2f00b3680a21f59d1c39ef832e 사진 출처:다음 영

영화 자체는 흥미로웠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은 상태로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으므로. 그러나 이런 스릴러의 궤도에 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꽤나 길고, 게다가 어느 정도의 지루함도 보장한다. 덕분에 따뜻한 상영관 안에서 일찍 영업을 종료하고 셔터를 내리려 하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느라 나름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또한 영화가 일정 부분 이상을 추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거칠게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난해하거나 혹은 과하다 싶은 상황 설명도 조금씩은 눈에 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보았을 때 주는 충격만큼은 꽤나 상당하므로. 고루하기 짝이 없는 초반부를 조금 견뎌낼 수만 있다면, 후반부가 이런 관객의 아쉬움을 일정 부분은 보상할 것이다.


[영화 감상 후 남긴 메모]

반드시 끝까지 가야 빠져나올 수 있는 구조/후계자가 안되려고 했는데 된다./야 이 양반아 신고를 해야지/진정제 그만큼 넣으면 안 될걸…??/그 와중에 안 다치겠다고 헬멧은 오지게 썼네/피는 못 속이는구나/도미니크에겐 지옥밖에 안 남았는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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