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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었건만 보아줄 이 하나 없네.

영화 [한란] 리뷰

by Munalogi

이 글은 영화 [한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이;제 3자, 목격자 그리고 당사자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초반부의 참사는 상당 부분이 해생(김민채)의 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소녀라는 말조차 너무도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이 작은 아이는, 그날 일어난 비극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제 3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말 한마디, 비명 한 조각 내지르지 않은 채 이 아이는 군인들의 살육을 꼭꼭 씹어 눈에 담는다.


이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순박한 제주도민들의 말처럼, 군경이 그럴 리가 없다며 백기를 들고 투항하지만. 자신들을 겨냥한 총구를 보고 난 뒤에야 어리둥절함을 느끼는 순간처럼.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처한 비극의 마지막을 깨우치게 되는 순간처럼. 이 어린 생명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분명히 좋지 않은 일임을 서서히 느끼며 입을 다문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보며 언제나 존재해 준 친절한 관찰자들을 만나왔지만. 타인의 미래를 훔쳐본 목격자였다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해생을 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것이 아이가 어렴풋이 이해했을 사건의 잔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가 손수 차린 밥상 때문이었다.


엄마인 아진(김향기)에게 가기 위해 작은 보따리를 짊어졌던 이 아이는 어느덧 몰려온 고단함과 허기에 그 짐을 푼다. 이미 죽어버린 할머니, 산속에 숨어있을 아버지, 그리고 조만간 만나게 될 어머니의 수저를 하나하나 놓은 뒤 그 위에 볶은 콩을 한 알씩 올린다. 아직도 손 마디마디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을 법한 그 여린 손으로. 해생은 그제야 자신의 입에도 한 알의 양식을 넣은 뒤 소중히 씹는다.


부디 다른 영화처럼 “아이”라는 설정이 최후까지 살아남는 “다음 세대”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작은 손으로 차린. 가족 모두를 초대한 제사상 앞에서 해생의 미래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에게 이토록 잔인한 결말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포함한 그 당시 그곳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사실이었으므로.



비극의 잔인함;아름다움의 아이러니
사진 출처:다음 영화

널브러진 시체들은 말이 없고, 낭자한 피는 마를 줄을 모르건만. 이 와중에도 눈앞에 펼쳐진 제주의 풍경은 속절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렇게 영화 속 제주.라는 배경은 이 비극에 허망함과 잔인함을 더한다. 아진의 남편은 조용히 걷던 바람도 쉬어갈 법한 넓고 트인 밭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도민 연합군(?)은 제주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바닷가에서 모조리 목숨을 잃는다. 맞으면 열병에 걸렸다 해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장대비 속에서 도롱이(우비)를 입은 두 모녀의 모습에조차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영화는 이렇게 제주의 산을 비추고. 집을 비추고. 때론 하늘을. 또 때로는 밭과 바다를 비춘다. 내륙인들에겐 선망했던 아름다움이자 기대했던 모든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어째서인지 바라던 이 풍경을 멍하게 바라볼수록 의아한 물음이 가슴을 계속 메운다.


이 비극이. 정말로 이 풍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이 의문의 힘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슬픔으로 바뀐다. 약속한 것처럼, 계절은 조용히 바뀌고 마침맞게 눈도 찾아왔으며, 이 시리고 긴 겨울 속에서도 여전히 한란은 피었건만. 이 당연한 변화 앞에서 생경함을 느껴줄 이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아줄 이 하나 없는 이 풍경처럼. 기억해 줄 이 하나 없는 사건도 기억되지 않을 것 같은 씁쓸함이 느껴진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를 본 후 남긴 메모]

부디 다음 세대가 되어주길 바랐건만ㅠㅠ/제삿밥 아녀ㅠㅠ차리지 마라ㅠㅠㅠ으아아아ㅠ/거짓된 믿음도 믿음이고 이념이 되는 무서운 순간/캐릭터나 만듦새가 약간 연결이 잘 안 되는 부분은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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