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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Oct 23. 2021

20년 산 남방을 입을 수 있는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

2020년 산 남방 아닙니다


 본디 명품이나 의류, 꾸미는 데 관심이 없다.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단 어렸을 때부터 적은 용돈으로 옷값을 감당하려면 최대한 유행 타지 않고 무난하고 오래 입을 옷이 제일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옷은 청바지와 남방. 청바지는 정말 만능 아이템이었다. 평상복이든 세미 정장이든 어떤 옷을 매치해도 다 잘 어울려서 코디에 큰 고민이 필요 없었다. 남방은 똥배 가림 용도로 최고였다. 신발도 자주 못 신고 또 신으면 불편한 구두보다는 편한 운동화가 좋았다. 평소 자전거를 많이 타기도 했고. 출근할 때도 여성스러운 정장, 블라우스보다는 카라티에 면바지 청바지 조합을 선호했다. 임신하고 출산을 준비할 때는 임부복 외에 다른 옷들은 더 필요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옷을 거의 안 사면서 버티고 있다. 작년 2학기에 복직을 하면서 세웠던 첫 목표가 옷 안 사고 버티기였는데 다행히 무난히 성공했다. 격일제의 원격수업 덕분에 이틀 동안 같은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도 한몫. 둘째 시누이가 가끔 인터넷 쇼핑으로 실패했던 옷들을 주시는데 이것도 정말 유용하다.



 

 하지만 이런 나라고 왜 예쁜 옷이 사고 싶지 않겠는가. 평소 입지 못하는 사이즈의 옷을 동경하지 않겠는가. 맞지 않는 옷을 교환하는 일은 죽어도 싫기에 인터넷 쇼핑보다는 직접 가서 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렇다 보니 더 안 사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그래도 평소에 쇼핑몰을 둘러보고 어떤 옷이 예쁜지 나에게 어울릴지 등을 미리 생각해놓기는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방송된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를 보고는 새로운 옷을 사지 말자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의류 산업으로 발생하는 폐수가 강으로 그대로 흘러드는 그 나라의 모습을 보니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그들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다. 또 새롭게 닥쳐올 재앙이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지 않는 옷을 중고로 처리하는 것이 가끔은 귀찮아 헌 옷 수거함에 넣을 때가 있었는데, 그래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필요한 누군가는 입겠지 하는 생각으로 뿌듯함마저 느꼈었다. 그런데 이 많은 옷이 결국은 쓰레기 산이 되고 강물을 오염시키는, 소각되어 공기를 오염시키는 환경 파괴 주범이었다.

 



 플라스틱 프리 실천법이 나와 있는 책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에 보면 의류 및 패션 잡화에 대한 원칙이 나온다. 첫째 새 옷보다는 원래 가진 옷을 재활용하거나 중고 옷을 재사용하는 것, 둘째 새로 구매 시 천연섬유 제품(면, 마, 모, 대나무 섬유 등) → 재활용 소재 제품 혹은 재생섬유 제품 → 합성섬유 → 동물성 섬유 순으로 선택하는 것, 셋째가 합성섬유 세탁 시 미세섬유를 걸러주는 필터나 세탁 망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5R 실천법에 따른 다양한 방법들이 나와 있어 읽어보길 적극 추천한다.




 특별히 염두에 둔 것 몇 가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안 쓰는 행사용 티셔츠나 가방 거절하기

세탁소에 옷 맡길 때 비닐 커버를 씌우지 않도록 미리 요청하기

세탁소에서 받은 옷걸이 되돌려주기

합성섬유 제품 줄이기

찬물에 세탁하기 (따뜻한 물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뭐든 거절하기가 가장 우선 원칙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공짜 사은품 생겼다고 좋아하던 날들은 이제 안녕. 세탁과 관련해 내가 지켜온 것은 밝은 옷 어두운 옷 나눠서 세탁하기, 세탁물 모아서 한꺼번에 세탁하기, 건조기 사용 최대한 줄이기 정도였다. 그런데 물 온도에 따른 미세 플라스틱 발생량이라든지 탈수 횟수에 따른 마찰에 의한 미세 플라스틱 발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앞으로 지킬 목록에 리스트업 했다. 청바지는 원래 해오던 대로 자주 빨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자전거를 좋아하는 본인이 여름이면 특히 고통받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엉덩이에 나는 종기들이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습해서 그런 것 같은데 체질인 것 같아 특별히 치료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큰 아이가 올해 봄부터 엉덩이에 비슷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유전되는 거였어? 그런데 곧이어 둘째에게도 나타났다. 이 아이는 엉덩이가 아닌 배에 더 작고 많이. 내 몸이었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아이들의 몸에 나타나니 걱정이 멈추질 않았고, 결국 피부를 잘 본다는 아동병원에서 들은 병명은 ‘모낭염’이었다. 형제끼리는 수건이나 이불 등을 같이 쓰기에 잘 전염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불 세탁도 더 자주 하고 수건은 특별히 구분해서 사용했다. 그런데 도대체 연고를 바르고 먹는 약을 먹어도 나을 기미가 없자 선생님은 혹시 세탁물 잔류 세제일 수 있으니 다른 세제로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까지 하셨다. 있는 세제를 처분하기는 그래서 그때부터 세제량을 조금씩 줄여서 사용했다. 하지만 염증이 가라앉다가도 날씨가 더워지니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환경 글쓰기 미션으로 세제 정량을 확인하는 내용을 보는 순간 꼭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오늘 실천했다.




 여행 다녀온 빨래들을 하면서 마침 똑 떨어진 아기 세탁 세제도 샀겠다, 더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오늘 그 미션에 도전했다. 예전에 큰아이 산후조리를 할 때 도와주신 이모님이 아기 세탁기 사용을 할 때 원래 헹굼이 두 번 자동 설정되어 있는데, 해보니 세제가 다 헹궈지지 않아 자신은 세 번으로 늘려서 한다고 하셨다. 그 후로는 나도 당연하게 세 번으로 하다가 큰아이가 아토피 진단을 받으면서 네 번, 다섯 번으로 점점 늘려갔다. (최대는 여섯 번이다.) 세제 줄일 생각은 왜 못 했을까.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아기사랑 세탁기 용량은 3kg인데 이게 세탁조의 크기가 아니라 모터가 견딜 수 있는 물에 젖은 세탁물의 무게를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시작부터 충격! 그럼 물의 양이 얼마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지?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물을 받아서 확인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큰 세탁기처럼 물이 위에 있는 좁은 구멍에서 쏴아 뿜어져 나오면 물 받기가 쉬울 텐데, 아기 세탁기는 탈수조 옆을 따라 졸졸 흘러 바닥부터 물이 차오르는 시스템이었다. 물 받으려던 양푼으로 물을 받아서 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결국 반대로 물을 집어넣으면서 측정해보기로 했다.


 우선 세탁기 수위에 각각 얼마만큼 차는지 탈수조에 방수 스티커로 높이를 표시했다. 그다음 물을 비우고 다시 양푼으로 그 높이까지 1L씩 횟수를 세어가며 들어가는 물 양을 체크했다. 그 결과 저수위는 약 20L, 중수위 약 26L, 가장 많이 쓰는 고수위는 약 32L 정도가 된다는 걸 확인했다. 내가 쓰고 있는 아기 세제의 정량은 물 50L에 세제 50mL를 넣으라고 되어있으니, 결국은 우리는 아무리 많이 넣어도 30mL를 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 번 세탁할 때마다 세제 뚜껑 가득 거의 100mL를 넣었었는데, 이건 정량의 3배가 넘는 양이었다. 어우.. 갑자기 소름이 쫘악 돋으면서 끔찍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엄마가 미안해. (유유....) 마침 안 쓰고 있는 아가들 약통에 딱 25mL까지 표시가 되어 있고 찰랑거리게 담으면 딱 30mL 정도가 될 것 같아 앞으로 세제 통 뚜껑 대신 써보기로 한다.



 



 복직했던 학기에 옷 안 사기를 실천하는 데 새로운 걸림돌이 있었으니, 입던 옷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스트라이프 티셔츠 앞에도 구멍이 뽕, 좋아하는 청바지에도 구멍이 뽕뽕. 바지는 7년 정도, 티셔츠는 거의 12년을 입었으니 많이 입어서 구멍 뚫릴만하다 싶으면서도 왠지 버리기는 아까웠고, 그렇다고 비슷한 모양에 내 체형에 잘 맞는 옷을 다시 찾아 사려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티셔츠는 버리고 비슷한 옷을 새로 샀지만, 청바지는 그대로 입고 있다. 주머니 부분의 구멍이 입을수록 섬유 가닥 줄이 생기며 일부러 찢어놓은 듯 예쁜 모양새로 변했기 때문이다. 공짜 빈티지 바지가 탄생했다. 출근복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상의로 살짝 덮이는 위치여서 한 학기를 무사히 버티고 무려 두 학기 째도 버텨냈다. 기특하도다. 엉덩이에 구멍이 나지 않는 이상은 오래오래 입어야지.

 

 옷 정리도 할 겸 옷장을 뒤적뒤적해보니 대부분 기본 8년 이상 된 옷들이다. 그중에 최고령은 2002년에 산 초록 체크무늬 긴 남방. 무려 20년 산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옷이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팔목이 헤져서 흰 섬유가 드러나는 것 빼고는 다른 곳은 멀쩡하다. 이번 주부터 아침저녁으로 유독 선선함이 느껴지는 것이 절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싶다. 입추가 지났으니 이제 정말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이 남방을 꺼내 입을 생각에 설렌다. 그리고 오늘 설레는 꿈 하나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바로 아이들에게 이 옷을 물려 입히는 것. 95 사이즈의 남방이니 10년 정도만 더 입고 아이들이 중학생 정도 되었을 때 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구두쇠 엄마라는 소리 말고, 엄마가 입던 옷을 입게 되어 행복하단 말을 들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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