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가는 것!
요즘 미니멀리즘이 대세다. 정리의 달인들이 유명해지고 미니멀하게 살림을 잘 사는 사람들의 팔로우 숫자가 늘어나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 집을 돌아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현실. 24평 신혼집에 방 2개는 이미 창고이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구 위의 안드로메다인 이곳. 이즈음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정말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았다. 인정하면 정말 앞으로 계속 집이 엉망일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인정하지 않아도 이미 엉망이니 얼마 전부터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잘하고 싶은 것인데 조금은 속이 상한다. 나도 한때는 잘했던 것 같은데. 시험 치기 전에 책상 정리부터 하던 사람 나야 나. 요즘도 근무하다 머리가 복잡하면 다 내려놓고 꼭 청소부터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건 평소에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 1월에 둘째가 돌이 지나면 3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고 미뤄두고 쌓아뒀던 집안 정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2월부터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더니 첫째마저도 가정 보육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2학기 복직인데 정리는 도대체 언제 하지? 아이들 보는 게 힘들다기보다는 그 시간에 하고 싶은 다른 걸 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겼다. 삶의 의욕이 없던 그때 도저히 안 되겠다 결심을 하고 3월 중순부터 첫째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냈고 4월 중순부터는 둘째도 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보낼 수밖에 없으니까! 하면서 쿨한 척 나름 합리화 그러면서도 코로나 위험은 나 몰라라 하는 엄마가 된 듯한 자책도 하면서.
그래도 일단 아이 둘을 맡기고 혼자 집에 있으니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해야 할 숙제들을 해치우기 위해 몰입하기 시작했다. 보통 평소 한 달 6~7권 정도 독서를 하는 편이었는데 정리 숙제를 시작한 이후로는 두 달 동안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 틈만 나면 정리법 검색에 정리 도구 비교, 구입, 또 정리에 정리. 인테리어 앱 '오늘의집'에서 다른 사람들 집은 어떻게 정리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정리 용품들도 엄청나게 샀다. 선반, 바구니, 식품 소분 케이스, 벽걸이 등. 두 달 쇼핑만으로 순식간에 vip 등급을 얻었을 정도다. 일단 필요 없는 물건들부터 없애니 빈틈이 보여 한결 나아졌고 나머지 자리에 정리 용품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빈틈에 뭔가를 다시 채우고 있었다. 언젠간 쓰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버리지 못한 것들,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있지만 예쁘게 담기 위한 그릇들, 코로나로 외출이 힘드니 집에서 모든 메뉴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물품들은 다시 그 자리를 채웠고 결국은 더 이상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교실이라는 새로운 정리 공간까지 생겼으니 어려운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복직을 하면서 남편과 더 넓은 집으로의 이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거실 베란다 확장형 구조인 지금의 집은 거실은 널찍했으나 방 3개가 모두 좁다. 장난감을 거실에 다 펼쳐놓고 생활하니 점점 집이 놀이터가 되어가는 것 같아 답답했다. 그런데 정리를 하면서 문득 든 깨달음이 있었다. 집이 넓어지고 있던 물건들을 넣고도 자리가 남으면 나는 또다시 그곳에 무엇을 채울까를 고민할 것 같았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해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리라. 나는 그제야 정리는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고 그것의 자리를 정해주는 것이라는 기본 원칙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요즘 넘쳐나는 정리 책을 보면 과감히 버리라는 조언이 많다. 설레지 않으면 필요 없으니 버려라! 그 의미가 진짜 버리라는 것이 아닌 중고로 처분하는 부분까지 모두 포함하는 의미일 텐데, 막상 그 수많은 물건들을 일일이 값을 매겨 처분하기에도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쓰레기로 모두 버려버리자니 제대로 썩지 않을 흔적들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마련. 그리고 가장 문제는 내가 추억을 에너지 삼아 살아가는 맥시멀리스트라는 것. 국민학생 때 주고받던 친구들과의 펜팔 편지들, 교회에서 편집부로 활동할 때 만들었던 주보들, 수능과 임용 준비할 때 열심히 정리했던 자료들과 시험지들... 끝도 없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만들어 온 작품들, 학습지들, 교재들 이런 것들까지 점점 더 추가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의미가 있는 것들이지만 지금의 공간을 더 의미 있게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떠올릴 만한 물건들과 미래에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물건들 사이에서 현재 필요한 물건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새겨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24평의 지금 집을 제대로 정리하는 훈련을 꼭 하고 난 뒤에 이사를 가고 싶다. 더 넓은 집으로 가서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이것이 내가 이사를 안 가는 이유다. 공간 컨설팅 전문가 정희숙 님의 책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를 읽다가 내가 느낀 지점과 정확히 겹치는 부분을 여럿 만나 연필로 밑줄을 좌악 긋고 색깔 띠지도 붙였다.
· 큰집으로 이사 간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아무리 넓은 집으로 옮겨도 정리의 기준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5평짜리 원룸에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공간마다 목적이 있어야 한다.
· 물건을 적당히 갖는 것은 삶을 통제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소유하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물건에 삶이 압도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주객전도라는 말,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인데 이 문장을 읽자마자 엄청난 현타가! 당장 쓰지 않는 아기 물건부터 정리해야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들만 둘을 낳아 첫째 옷이나 물건을 둘째에게 물려줄 수가 있는데, 둘째가 입고 신고 더 작아진 것들도 한 살 어린 조카에게 물려주려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다. 더 가지고 있다가 셋째라도 생긴다면... 그러기 전에 얼른 정리해야겠다. 생각을 이렇게 바꾸니 귀찮게 느껴졌던 일이 갑자기 당장 하고 싶어진다. 워킹맘이 살림까지 잘하면 반칙인 것 같지만... 그래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