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그날 이른 아침, 나는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알던 남편의 얼굴이 아닌 것을 보았다. 그날은 오랜만에 남편과 재래시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 부부는 가끔 시장을 들러 육회와 김밥을 먹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었다.
새벽녘, 알람 소리에 먼저 깨어난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옆자리의 남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깨웠다.
"일어나, 늦었어"
남편은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미안해, 지난주는 정말 힘들었어. 수업에, 새로 시작한 연극 연습에... 남양주에서 일산까지, 또 서울 대학로를 오가느라 정신없었어. 주말인데 좀 더 자고 싶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휴일의 늦잠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시장에 가기로 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저 빨리 서두르길 바랐다. 나도 시장에 가고 싶어 일주일을 기다렸고, 그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남편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또렷이 들리지 않아 나는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뭐? 말 좀 똑바로 해봐. 잘 안 들려?"
"이비아움지겨"
남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그를 재촉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일까? 남편의 얼굴이 이상하게 비틀려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눈은 눈썹 위로 올라가 있었고, 입술은 턱 아래로 처져있었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 속 인물처럼 보였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녹아내린 시계처럼 그의 얼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왜... 왜 그래? 어디 다친 거야?" 당혹감에 휩싸여 물었다.
남편은 대답 대신 왼쪽 얼굴을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뒤틀린 얼굴은 더욱 괴상해졌다. 마치 고무찰흙으로 만든 얼굴을 누군가 마구 주물러놓은 것 같았다.
남편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듯 얼굴을 감쌌다. 나는 좀 전의 짜증 냈던 내 태도가 미안해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모르게써. 야초지를 하는데 이베서 무리 주주세.?
그의 말은 더듬거리며 나왔고, 발음은 점점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마치 취한 사람처럼 혀가 꼬인 듯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와 동시에 어색함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침부터 그를 재촉하고 짜증 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응급실 가자."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그의 왼쪽 얼굴 근육이 마비된 듯 보였다. 뇌졸중? 안면마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편과 나는 올해 마흔 살이 되었다. 결혼 전, 우리가 함께 거리를 걸을 때면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곤 했다. 남편은 이국적인 외모에 키가 컸다. 또 유명 연예인을 닮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때 그는 빛나는 보석 같았다. 까만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사이로 빛나던 그의 눈동자는 마치 깊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날카로운 턱선은 조각가가 정성스레 깎아 만든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선 그의 얼굴에서 그 시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때 빛나던 그의 용모는 세월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었다. 매끈하던 피부는 거친 모래종이처럼 푸석거렸고, 생기 넘치던 눈빛은 흐릿해져 있었다. 한때 까맣고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이제 군데군데 회색빛을 띠며 성긴 모습이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누구 하나 남편에게 두 번 눈길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과거의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보고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은 언제나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그는 종종 내가 퇴근해 집에 돌아와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근처 시댁에서 묵고 오곤 했다. 그의 부재는 어느새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주말에도 그는 연극 연습이나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바빴고,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며 사는 사람 같았다.
돌이켜보니 남편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었다. 화려했던 꽃이 시들어 가듯, 그의 아름다움은 조금씩 바래갔고, 나는 그저 곁에서 무심히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그의 얼굴에 새겨지는 주름, 점점 깊어지는 눈가의 그늘, 그리고 눈빛 속에 스며드는 피로감을 나는 어떻게 놓칠 수 있었을까?
"뭐 해? 빨리 옷 입어" 나는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
"파어주기잖아" 남편은 틀어지는 얼굴을 붙잡고 억지로 말했다.
"알아. 파업 중인 거. 그리고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그의 고통스러운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런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두려움이 나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남편은 잠깐만 기다리라며 베란다로 나갔다. 남편의 유일한 취미는 베란다에서 화초를 가꾸는 일이었다.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베란다로 나가 화초에 물을 주고 젖은 수건으로 열심히 닦았다. 그날도 화초 하나하나에 물을 주고 젖은 수건으로 열심히 그것들을 닦았다. 뒤틀린 얼굴을 붙잡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그것들에게 햇빛을 받게 한다고 베란다 커튼을 올렸다. 햇빛이 베란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언젠가 남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베란다에서 맞는 햇빛이 좋아. 햇빛만 보면 옷을 벗어던지고 온몸으로 그것을 받고 싶어"
그 말을 했을 때의 그는 행복해 보였다. 지금의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남편이 얼굴을 돌리자 햇빛을 받은 남편의 뒤틀린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남편의 얼굴은 괴물 같았다. 아니 괴물이었다. 나는 짧은 신음을 뱉고 말았다. 산발된 머리는 햇빛을 받아 붉게 불타고 있었고, 두 개의 눈은 서로 증오하듯 각자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콧구멍은 더 이상 아래를 보기 싫은 듯 하늘을 향해 들쳐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입술은 마치 웃고 있는 듯 위로 올라가 있고, 왼쪽 입술은 울고 싶은 듯 아래로 처져있었다. 마치 타인의 몸을 만지듯 떨리는 손을 뻗어 남편의 얼굴을 만졌다. 그의 피부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경직된 근육들이 그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아플까? 고통스러울까? 나는 물었다.
"아파?"
남편은 얼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 따드테"
그의 왜곡된 발음에 다시 짜증이 났다. 우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하는 동안, 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공포와 불안이 그를 휘감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택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들이 마치 흐린 물감처럼 번져 보였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모두 이 아침의 사건으로 인해 뒤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의 얼굴처럼 왜곡되고 비틀린 채로.
파업 중인 병원은 마치 유령의 집 같았다. 의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환자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복도와 대기실은 평소의 분주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의사가 줄어들면 환자도 줄어들까?'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남편은 왜 하필 의사도 줄어들고 환자도 줄어들 때 아픈 걸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나의 불행이 이 모든 상황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만 같았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들로 북적였을 공간이 이제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환자보다 간호사가 더 많아 보였고, 의사는 단 한 명만이 있었다. 그마저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의사는 남편의 뒤틀어진 얼굴을 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그의 표정에서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엑스레이를 찍었고, 결과를 확인한 의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뇌출혈이 의심됩니다. 당장 입원하셔야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파업 중이라 여기서는 입원이 불가능합니다. 입원할 수 있는 다른 병원을 찾아보세요."
분노와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어떻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환자를 돌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에 휩싸일 때가 아니었다. 남편의 상태가 최우선이었다.
남편이 힘겹게 말했다.
"우서 지베가자"
그의 왜곡된 발음에 가슴이 아팠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 집에 가자. 집에 가서 병원을 찾아보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여전히 활기찼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남편은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마치 그의 뒤틀린 얼굴을 닮아 기괴하게 흘러내렸다. 오른쪽 눈물은 위로 흘렀고, 왼쪽 눈물은 아래로 흘렀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병원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내 말에 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남편의 손을 꼭 잡았지만 그의 온기가 어색했다.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는 소위 '명품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인생의 모든 목표를 달성한 것 같은 성취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여보, 우리 정말 거기서 살아야 해? 대출금은 어떻게 갚아?" 남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들은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곳이야. 우린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당신은 일을 좀 더 늘리고, 나도 열심히 일하면 돼"
남편은 자연을 사랑했다. 그는 늘 서울의 번잡함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에서 살기를 꿈꿨다. 언제나 내 의견에 순응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지함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닭장같이 사람들이 빽빽이 몰려있는 곳에서 살면 난 시들어 버릴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 다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방에, 똑같은 화장실에... 똥을 싸면 그 똥도 모두 같은 곳에 모일 거 아냐. 햇빛도 안 들어오는 곳에 있으면 정말로 시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왜 그래 유치하게. 다들 아파트에 못 들어가서 난리인데."
나는 그의 말을 일축하며 내 의견을 강제로 밀어붙였다. 남편은 결국 내 뜻에 따랐고, 나는 그가 순순히 동의한 줄로만 알았다. 이사 당일, 남편은 그의 크고 맑은 눈으로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베란다! 내가 써도 될까?"
"안 돼. 빨래 말려야 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반만. 반만 쓸게. 햇살이 너무 좋아 화초라도 놓게." 그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파트로 이사한 후, 남편의 생활 패턴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는 일을 늘렸고, 하루 종일 밖에 있었다. 시댁 근처에 일이 있는 날이면 꼭 그곳에서 잠을 자고 오곤 했다. 마치 집에 들어오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밤이면 남편은 숨 막히는 듯한 불편함을 호소했다. 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밖으로 떨어질 듯 얼굴을 내밀곤 했다. 그의 행동이 과장되어 보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절박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마치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시들어가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핼쑥해졌고, 눈빛은 생기를 잃어갔다. 한때 빛나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그림자처럼 희미해져 갔다.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찾는 일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어려웠다. 수십 통의 전화와 수많은 거절 끝에, 마침내 경기도 외곽의 작은 병원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곳마저도 삼 일 후에나 입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조급해진 나와는 달리, 남편의 표정에는 이상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뒤틀린 얼굴이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정되어 보였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듯. 남편은 그때까지만이라도 베라다에서 지내길 원했다
나는 화가 났다. 남편은 왜 자꾸 그곳에 가길 원하는 걸까? 그 이유를 물었다.
"해비츨 바고 싶어."
그의 왜곡된 발음으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햇빛을 받고 싶다'는 그의 말에, 평소 같았다면 단번에 거절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남편은 베란다 반을 차지하고 있던 건조대를 치우고, 그가 지낼 수 있도록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 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남편의 과거가 떠올랐다.
남편은 늘 자유를 갈망했다.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고 강의와 연극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선택이 회사 다닐 때만큼의 수입을 가져다주었기에, 나는 겉으로는 그를 응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정된 직장, 안정된 삶.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 사업을 한다며 집안의 모든 돈을 끌어다 투자하고, 친척과 지인들까지 피해를 입히고, 교통사고로 미련 없이 떠난 아버지의 그림자가 나를 짓눌렀다. 나는 호화로운 삶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걱정 없이 안정된 삶을 사는 것, 그뿐이었다.
남편이 미래를 위해 세웠던 계획들은 내 귀에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으로만 들렸다. 몽상가들이 지껄이는 한가한 꿈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자꾸 어긋나려 하는 남편을 통제했다. 나는 남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마치 남편의 허리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묶어 한정된 공간만 움직이도록 만든 것 같았다. 그에 보답하듯 남편은 더 이상 크게 숨 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남편이 베란다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집으로 수없이 많은 화분들이 배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베란다는 꽃과 화초들로 가득 차 작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끝없는 숲 속 길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햇빛이 들어오는 낮에는 꽃과 화초들이 반짝반짝 빛났고, 마치 작은 새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밤이 되어 베란다 커튼이 내려오면 고요한 숲으로 변했다. 적막 속에서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평온한 물줄기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남편은 점점 그 작은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삼일째 아침, 햇살이 들기 시작하자 어느새 베란다 커튼은 올라가 있었고, 남편은 그것들에게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행동이 걱정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밥 안 먹을 거야?"
남편은 윤기 없는 푸석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남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바로 저 옆모습. 학교 선배에게 남편을 소개받던 날, 약속 장소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때 남편은 마치 동화 속 왕자님이 현실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나는 첫눈에 반했다. 지금 베란다에 서 있는 남편의 모습도 그때와 똑같았다. 꽃과 화초들 속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남편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말했다.
"자기, 얼굴... 얼굴이!"
남편의 뒤틀렸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남편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마치 오랜 여정을 거쳐 무언가를 찾은 듯한, 어딘가를 헤매다 돌아온 듯한 눈빛이었다.
한때 멋있고 아름다웠던 그의 눈빛은 이제 외롭고 그리움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내 갈 길을 찾았습니다. 나는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날, 아침 일찍 남편을 병원에 내려주고 출근했다. 그는 혼자 가고 싶어 했다. 이제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은 온통 남편 걱정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남편에게서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회사를 조퇴했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은 다시 베란다 안에 그의 '그것들' 속에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안도감과 동시에 답답함을 주었다. 나는 그곳이 싫었다. 남편을 빼앗아 가는 거 같았다.
"병원에서 뭐래?" 숨을 몰아쉬며 남편에게 물었다.
"괜찮대." 남편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왕자 같은 외모에 걸맞은 부드럽고도 위엄 있는 음성, 백성들에게 존경받을 법한 그 목소리.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음성이었다. 남편은 그 익숙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이사 가면 안 될까? 어머님이 사시는 파주에 좋은 전원주택이 있대."
남편의 눈빛에는 동의를 구하는 듯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여기는 좀 답답해. 공기도 나쁘고... 또 이제 몸도 괜찮아졌잖아. 내가 더 열심히 일할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나의 안정된 삶에 대한 집착이 한데 뒤섞여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뭐가 답답하다는 거야. 지금 아파트 가격도 많이 올랐는데. 그리고 베란다 있잖아. 그걸로 만족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훨씬 매섭고 차가웠다.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남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에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기 시작했다. 남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화가 날 때마다 그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습관. 우리가 다툰 다음 날이면 늘 그의 입술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이유였다.
그날 이후로 남편은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곳, 베란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찾은 남편의 잘생긴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남편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아파트에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물으면 남편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충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행동이 유치한 무언의 시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침묵 속에는 결심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능상의 문제보다는 마음의 병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뒤틀린 얼굴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남편의 문제는 무엇일까? 어떤 괴로움이 심인성 장애까지 불러일으킨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남편의 이런 행동이 약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어린애 같은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도 떨쳐낼 수 없었다.
사회가 가르쳐준 대로,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강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밑바탕에는 내 소유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안정을 갈구하는 나의 욕구가 남편의 자유와 행복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지난 한 달은 평화로웠다. 아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남편은 더 이상 이사 문제를 꺼내지 않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그동안 밀려왔던 일을 보충하듯 더욱 부지런히 다녔다.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남편이 더 이상 베란다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아파트, 멋진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남편, 모든 것이 적절한 비율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커피 같았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 속에 숨겨진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남편의 눈빛에서 간간이 보이는 공허함, 그의 미소 뒤에 숨겨진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의 안정된 삶이 깨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3일간의 일정으로 지방 출장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기 힘들어 지하주차장에서 남편을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방을 끌고 집에 올라가 벨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에서 흙냄새가 났다. 거실과 베란다를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곳 냄새가 싫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세게 닫았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힘들고, 지치고, 배고프다. 오늘만큼은 남편에게 나도 위로받고 싶다고.'
거실 바닥을 보니 그곳에서 들어온 듯 흙이 뿌려져 있었다. 꽃잎과 이파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하지만 부엌은 깨끗했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듯했다. 안방 문을 열어보니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저녁 9시가 안 되었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겠지만 미리 연락했음에도 먼저 잠든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나는 다음 날 남편에게 따지기로 했다. 허기와 피로 때문에 나는 씻지도 않고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외롭게 서 있었다. 남편을 불러보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남편의 사랑을 원했다. 남편만을 바라보며, 그와 함께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하지만 꿈에서조차 남편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나는 끝없이 남편을 갈구했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거친 음성이었다. 그리고 불명확했다.
"이러나 떠?"
나는 눈을 떴다. 어제 닫았던 베란다로 통하는 문이 다시 활짝 열려 있었다. 남편은 다시 그곳에 있었다. 그것들 속에 파묻힌 남편의 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다가갔다. 그때 나는 놀란 걸음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남편의 몸은 푸르게 변해 있었고, 얼굴의 눈코입은 다시 제멋대로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알몸으로 베란다로 비치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남편의 몸에서 풀냄새 같은 비릿한 냄새가 났다. 마치 식물의 엽록소처럼 그의 피부는 햇빛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말했다.
"무, 무을"
나는 부엌으로 뛰어가 물을 떠 왔다. 그리고 남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남편은 다시 말했다.
"쁘려"
"뿌려? 물을 뿌리라고?"
나는 컵을 들고 남편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그 순간, 남편의 피부가 반짝이며 빛났다. 마치 식물이 물을 흡수하듯 그의 피부는 물방울을 빨아들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의 푸른 피부, 뒤틀린 얼굴, 그리고 햇빛을 흡수하는 듯한 모습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는 평온해 보였다.
"여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남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공허함이 없었다. 대신 평화로움과 찬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나뭇잎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남편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 그가 느꼈던 답답함, 그리고 그가 왜 그렇게 자연을 그리워했는지. 그는 처음부터 이 도시의 삶에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정을 위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그 손은 이제 나뭇가지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남편은 말했다.
"나는 숲으로 돌아가"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베란다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베란다를 가득 채웠을 때, 남편은 이제 완전히 나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뿌리는 베란다 바닥을 뚫고 아래로 뻗어나가고 있었고,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을 주고, 그의 잎사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마 후 나는 집을 팔고 시골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며 살기로 했다. 남편이 변한 나무는 화분에 심어 함께 데려갔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나무에 물을 주고 이야기를 한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지만, 이제는 후회 없이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밤이면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남편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미소 짓는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고, 또 함께 있다.